매일신문

[사필귀정] 여성 대통령 불가론

지난 밀레니엄 기간 동안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AD 1000년부터 1999년 사이를 살다간 정치 지도자는 나폴레옹 칭기즈칸 비스마르크 처칠 드골 루스벨트 대처 만델라 간디 레닌 케네디 덩샤오핑 반다라나이케 등 수없이 많다. 이 기라성 같은 정치 지도자 가운데서 뉴욕 타임스(NYT)가 선정한 밀레니엄 최고 정치 지도자는 뜻밖에도 남성이 아닌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앤 블린과 '수장령'(首長令) 선포로 영국 국교를 성공회로 정한 헨리 8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1세보다 한발 앞서 왕위를 물려받은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종교 탄압으로 피의 정치를 펴다가 재위 5년 만에 서거하자 왕좌를 물려받았다.

'블러드 메리'로 불리는 피의 여왕 메리 1세 치하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런던탑에 유폐되는 등 고난을 겪으며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하루아침에 배다른 언니의 뒤를 이어 25세 여왕이 등극하자 영국은 시끄러웠다. 유배까지 당했던 엘리자베스 1세가 복수혈전을 펼칠까 걱정했고, 결혼도 하지 않은 20대 '버진 퀸'이 나라를 말아먹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45년이나 통치한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유럽의 2등 국가에 불과했던 영국을 최강국으로 변모시켰다. NYT가 대영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빅토리아 여왕을 제치고 '밀레니엄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 엘리자베스 1세를 선정한 것은 이유가 있다.

제식훈련 한 번 받아보지 않았고, 군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던 처녀 여왕이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으며, 정파에 관계없이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는 통합의 정치를 펼쳤다. 또 구빈법을 제정하여 빈민들을 구제했고,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등을 후원하며 영국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1세는 퇴임 연설인 '황금의 대연설'에서 "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는 군주는 지난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지극한 영국 사랑을 표현했으며, 염치를 아는 이들의 가장 고귀한 게임이 정치라는 믿음으로 의회주의를 싹트게 했다.

최근 여당의 대선 예비 후보가 내뱉은 '여성 대통령 불가론'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새누리당 잠룡 가운데 한 명인 이재오 의원이 외신기자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분단 국가) 여성 대통령 시기상조론'을 편 것이다. 이 의원은 "나라가 통일돼 평화로워진 후라면 몰라도 아직은 (여성 대통령의) 시기가 이르다"고 여성의 위기 대응 능력이 남성보다 못하다는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 보였다. 분단 현실을 체험하지 않고 국방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리더십을 갖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원단체 및 63개 협동 회원단체들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구태의연한 성차별적 발언"이라고 지적하며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초한 그릇된 여성관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결코 국민의 지도자로 선택받지 못할 것"이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당 안팎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대구 달서 병)이 "정신줄 놓을 때가 아닌데…"라고 반격했고, 통합진보당 노회찬(서울 노원 병) 의원도 트위터에 "결과적으로 자신의 적을 돕는 발언을 거침없이 한다"고 언급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분석한 것처럼 이 의원이 '분단 현실 여성 대통령 불가론'으로 노년층 반공우익과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21세기는 3W 시대이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는 세계화(World) 웹(Web) 여성(Women)이 21세기를 주도하는 트렌드라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세계화와 웹에서는 우리나라가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여성에 관한 한 다르다.

2009년 현재 우리나라 여성의 권한척도는 세계 109개국 중 61위이다. 여성 권한척도가 이렇게 저조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변수가 여성의 부진한 정치 진출이다. 이재오 의원의 발언이 특정인을 겨냥한 발언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올 연말 대통령 선거에 나가겠다는 잠룡의 여성관이 이 정도라면 아직 멀었고, 실수라면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 사상부터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이 좋겠다. 공자는 군자라면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언급하지 않아야 하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이 순조롭지 않으면 도덕적 삶과 법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의원이 정명 사상을 되새겨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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