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26)전란으로 사라진 쌍계사

가로 2.5m 주춧돌 10개 웅장한 법당규모 짐작케 6·25때 北 방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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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때 북한군 패잔병이 불을 질러 소실된 증산 쌍계사. 폐사지에는 주춧돌만이 자리를 지켜 당시 가람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쌍계사를 찾은 날은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려 분위기를 더욱 숙연케 했다.
소실된 쌍계사 터인 증산면사무소 입구에 서 있는 250년 된 처진 소나무. 노송 3그루는 최근 보호소로 지정됐다.
소실된 쌍계사 터인 증산면사무소 입구에 서 있는 250년 된 처진 소나무. 노송 3그루는 최근 보호소로 지정됐다.

1951년 7월 14일. 어둠이 가시고 동이 터 올 무렵 적막에 싸인 증산 쌍계사 대웅전에 북한군 복장의 젊은 여자가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녀는 손에 기름통을 들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인기척이 없자 이내 텅 빈 법당을 돌아다니며 바닥에 무언가를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법당은 화염에 휩싸였다. 이내 화마가 모든 전각들을 삼켜버렸다. 불이 사찰을 모두 태우는 동안 불을 끄려는 사람들 모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잔불은 이틀 동안 지속됐다. 쌍계사의 모든 것이 한 줌의 잿더미가 됐다. 천년고찰 쌍계사는 이렇게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날 쌍계사에 불을 지른 북한 여군은 이곳에서 1㎞쯤 떨어진 장뜰마을(혹은 천왕문) 앞까지 달아나서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의 한 장면이다. 6월 호국의 달이면 증산 쌍계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주춧돌만 남은 쌍계사에 가랑비가 내리고

6'25를 앞두고 화마로 자취를 감춘 수도산(또는 불령산) 쌍계사(雙溪寺) 터를 찾았다. 쌍계사는 수도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절터 뒷산을 시루봉이라 부른다. 이곳 증산(甑:시루 증, 山:뫼 산)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시루봉 아래 지금의 옥동마을 대부분은 쌍계사 절터이다. 면사무소, 파출소, 학교 등도 모두 사찰 경내였다. 당시 민가는 일주문 아래로 오두막집 몇 채만 있었다.

증산면사무소에 도착하자 노인회장을 지낸 최병영(88'증산면 유성2리)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실된 쌍계사의 모습을 좀 더 알아볼 요량으로 수소문해 모셨다. 미수의 나이임에도 정정한 모습이다.

면사무소 뒤로 돌아가면 쌍계사 폐사지가 있다. 이날은 마침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쌍계사의 옛 영화는 간 곳 없고 주춧돌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주춧돌의 크기가 가로 2.5m, 세로 1.5m는 족히 됨직하다. 이런 주춧돌이 10개나 된다. 법당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대웅전은 높고 웅장해 장정들이 돌을 던져도 이를 넘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단일건물로는 해인사 대적광전보다 웅장했고 서울 남대문 다음으로 제일 컸다고 전해진다. 또 소속된 승려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쌀 씻은 물이 절 앞 대가천을 뿌옇게 물들여 성주까지 흘러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폐사지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도선국사가 859년(신라 헌안왕 3년)에 쌍계사를 창건했다고 적혀 있다. 청암사와 수도암을 사내 암자로 거느린 쌍계사는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로 6'25전쟁 과정에서 소실됐다.

◆북한군 패잔병이 불을 질러 잿더미로 변한 천년고찰

가랑비를 맞으며 폐사지를 둘러본다.

"인근 수도리에 빨치산과 북한 패잔병 3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인근에 국군이 주둔해 있어 낮에는 주민들이 활동을 했지만 밤이면 빨치산의 세상이었다. 주로 밤에 전투가 벌어졌다, 주민들은 무서워 집에 있지 못하고 산으로 피란을 갔다. 절에 불이 난 그날도 국군과 북한군이 야간에 전투를 벌였다. 날이 밝자 북한군이 주둔지인 수도리로 후퇴하면서 절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최 씨가 말문을 열었다.

최 씨는 "당시 절 앞 유성리 사람들은 뒷산에 땅굴을 파고 피란해 있었다"며 "절에서 불이 나 불길과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지만 북한군이 무서워 불을 끌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 "당시 스님들은 모두 떠나고 법당 한쪽을 면사무소로 사용했는데 북한군이 법당을 사용치 못하도록 불을 질렀을 것"이라며 "면직원 2명이 법당 마루 아래에 숨어서 당직을 섰는데 불이 나자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렇게 천년고찰인 쌍계사는 불이 났지만 전쟁 때문에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잿더미로 변했다.

쌍계사 터는 예로부터 호랑이와 용 중간에 위치한 길지로 알려져 있다. 도선국사가 절을 세우면서 '승천년 속천년'(僧千年 俗千年)이라고 했단다. 이 터에는 스님들이 천 년을 살고 일반 속인들이 천 년을 살 것이라고 했다는 것. 쌍계사가 세워진 뒤 1천110년 뒤인 1951년 소실되고 절터에 마을이 들어선 것을 보면 이 또한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실된 쌍계사는 괘불이 유명했다. 괘불은 창호지를 여러 겹 붙여 배접을 하고 그 위에 석가모니불을 그렸다. 천재지변, 특히 가뭄이 심해지면 대웅전 앞에 괘불을 내걸고 기도회를 열면 비가 내렸다고 한다. 청암사 계곡의 가장 큰 나무를 베어 기둥을 삼아 걸어도 괘불이 다 펴지지 않았다. 언제나 부처님의 하반신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괘불 길이가 32m, 폭 8m에 이르러 힘센 장정 대여섯 사람이 붙어야 겨우 들 수 있었다. 평소 괘불이 법당 부처님 뒤쪽에 있었는데 불이 났을 때 절에 있던 보물급 문화재와 같이 탔다고 전한다.

◆대웅전에는 웅장한 규모에 걸맞은 신비로운 전설 담겨

규모가 웅장했던 대웅전의 건립과 관련된 얘기도 흥미롭다. 주지 스님이 대웅전을 짓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너무 깊은 산 속인지라 절을 짓겟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때 마침 걸인 승이 나타나 절을 짓겠다고 나섰다. 주지는 자신의 마음을 짚어내는 신통력에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이끌려 법당 건축을 맡겼다. 걸인 승은 싸리나무 목재를 구해달라고 한 뒤 큰 포장으로 가림막을 둘러치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는 구해다 놓은 싸리나무 재목들을 토막나무로 만들기에만 열중했다. 주지 스님은 궁금했지만 약속을 했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몇 날 며칠을 토막 내기 작업을 한 뒤 그동안 만들어 놓은 나무토막을 헤아려 보고는 "한 개도 틀림이 없구나"고 말했다. 걸인 승은 "7일 동안 음식을 들이지 말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아무도 현장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가림막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법당 공사로 소란스러워야 할 포장 안쪽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7일째 되는 날. 저녁때쯤 절의 어린 행자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포장에 구멍을 내어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이게 웬일인가! 가림막 안에는 거대한 법당이 지어져 있었다. 행자는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침 마지막 나무토막을 물고 지붕꼭대기에 올려놓으려던 파랑새와 순간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파랑새는 입에 물고 있던 나무토막을 떨어뜨리고는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새는 건축을 마치면 자기가 빠져나간 뒤 마지막 토막으로 구멍을 막으려고 했다. 인간의 부질없는 호기심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 대웅전은 미완성의 건물이 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하늘이 훤히 보이는 법당 지붕은 비가 와도 네모난 구멍으로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 년 내내 햇볕이 들어오지 않다가 단 하루 하짓날 사시와 오시 사이(11시쯤)에 빛이 들어와 부처님 백호를 잠시 비췄다. 해마다 하짓날이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불자와 주민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수백 년 된 노송만이 절터 지켜

백련암 비구니 노스님은 대웅전 단청과 관련해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전한다. 주지 스님이 법당이 웅장하고 규모가 너무 커 단청을 입히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애인 스님이 단청을 해 주겠다며 나타나 "새 옷을 지어 달라"고 한 뒤 "가림막을 치고 일을 할 테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는 것. 그런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6일째 되던 날 안을 보았더니 금빛 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얼른 밖으로 나왔지만 새는 이내 날아가 버렸다. 이 때문에 쌍계사 대웅전 일부는 단청을 마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은 "절에 불이 나기 3일 전 절을 지키던 노인의 꿈에 노스님이 현몽해 바랑을 지고 절을 나서길래 '어디를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해인사로 간다'며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큰 법당 부처님이 절에 불이 날 것을 알고 먼저 떠난 것"이라고 말했다.

폐사지를 나오니 면사무소 마당에 수백 년 된 노송 세 그루가 서 있었다. 가지가 밑으로 처진 노송은 최근 보호수로 지정됐다. 면사무소와 보호수를 포함해 한 마을 대부분은 지금도 청암사 소유로 돼 있다. 면사무소는 매년 370만원 상당의 임대료를 사찰에 내고 있다. 절터인 옥동마을 주민 대다수도 임대료를 내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 콩 등 곡물로 냈으나 지금은 현금으로 내고 있단다. 청암사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부도 1기와 쌍계사 중수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옛 가람의 영광을 말없이 대변하는 듯하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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