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책쓰기는 벽을 넘는 것이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도종환의 '담쟁이' 중에서)

하늘이 며칠이나 계속해서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소나기가 잠시 다녀가기도 했다. 이런 비는 쓸쓸하다. 어떤 이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슬픔이 비가 되어 내린다고도 하고, 다른 이는 떠난 사람의 눈물이라고도 했다.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 그것이 내 꿈이라고 감히 말했다.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문명사회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하지만 단순히 흘리는 눈물은 불행한 사람을 불행하다고 인식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언어로 표현하면 일종의 '연민'이다. 그 행위가 진정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고통 받는 타인과의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 진정한 연대는 바로 정책으로 만나는 지점에 존재한다. 정책으로 발전하지 못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슬픔은 단지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정책으로 발현되는 순간 연민은 연대로 발전한다. 연민을 넘어 연대로 나아가는 거기에 대한민국의 '현재'가 지향해야 할 의미가 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벽은 높다. 그에 반해 연대를 말하는 사람들의 힘은 여전히 미약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더욱 쓸쓸하다. '이미 개인의 욕망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하는 마음의 움직임 때문이다.

시대가 달라지면 시대가 담는 연대의 의미도 달라진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는 1980년대에 존재했던 대규모의 연대가 아니다. 민족이나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대서사의 시대가 지나고 학교, 마을, 도서관, SNS, 블로그 , 카페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개별적인 부족들이 만들어가는 작은 서사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일종의 유목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존재하는 연대는 유연성과 자율성이 원칙이다.

책쓰기는 그런 연대를 가능하게 만든다. 학교에서 만들어가는 책쓰기는 동아리 형태의 활동이 좋다. 상처를 지닌 아이들은 함께 책쓰기를 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연민'하면서 '연대'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내가 지닌 재능과 지식을 서로 나누고 네가 품은 기쁨과 상처를 공유한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하던 그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연대는 개인의 욕망을 비우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심지어 개인의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함께 하려면 내 몫을 조금은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개인들은 내 몫을 비우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운 내 몫이 궁극적으로 내 몫으로 다시 돌아옴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연대이다.

무한경쟁은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수도 있다. 패배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경쟁의 조건이나 과정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그 경쟁의 조건이나 과정의 정립을 위한 연대다. 연대는 경쟁을 부정하지 않는다. 경쟁 속에서 서로 배려하고 나누는 마음이다. 연대는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지 말라. 연대는 분명 그 벽을 넘을 게다. 단순히 슬픔으로 사람을 담지 말고, 연민으로 사람을 포장하지도 말라. 연대로 희망을 말하라. 큰 틀을 강제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연대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어쩌면 그런 과정 자체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갈 게다. 벽을 넘었다는 결과보다는 '벽을 넘는다'는 현재의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연대는 황홀한 결과보다는 아름다운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이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보는데, 담쟁이 넝쿨이 거친 마디를 드러낸 채 담벼락에 붙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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