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와 토계리에 걸쳐 자리한 진성 이씨 퇴계가. 이 일대에는 동방의 주자 퇴계 이황 선생의 사상과 학문, 삶이 오롯이 스며 있다. 퇴계 이황은 아버지가 안 계셨음에도 밝고 어머니를 돕는 효자였다. 선생이 자라 스승이 됐을 때에도 제자들의 인격을 존중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고 의견이 달라도 존중해 주었다. 선생은 뇌물을 가지고 온 자에게 혼을 내 돌려보냈고 임금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벼슬을 잃는 정직한 인물이었다. 죽기 직전에 '내가 죽으면 나라에서 치르는 장례를 사양하고 가족들끼리 간소하게 장사를 지내라. 그리고 무덤에도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비석만 하나 세워라. 비문에도 벼슬 이름은 넣지 말고 호와 이름만을 넣어라'고 했다. 이렇듯 선생의 간소한 마음이 고택 곳곳에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퇴계종택, 검소와 겸손이 묻어나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종택(退溪宗宅'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은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의 종택이다.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에 못 미쳐 우측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상계'(上溪)에 이르면 오른쪽에 종택을 만날 수 있다.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현판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앞 대문에 게판돼 있다.
이 건물은 1907년(순조 1년)에 옛 종택이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돼 사림(士林)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것으로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공 이충호가 옛 종택의 규모를 따라 신축했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자 형태인데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우측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추월한수정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란 현판 등이 게판돼 있다. 본채의 솟을대문은 '정려문'(旌閭門)으로도 유명하다. 여느 집안의 정려각을 지어 세웠던 정려비와 달리 퇴계가는 정려문을 세웠다. 이 문은 선생의 장손인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의 처(妻) 안동 권씨의 정려문으로 문 위에는 '열녀 통덕랑 행사온서직장 이안도처 공인 안동 권씨지려'라 적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팔작기와집으로 내부에는 불천위 퇴계 선생의 신위를 비롯해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추월한수정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방과 마루방을 꾸민 구조로 되어 있다. 마루 좌측의 방은 '완패당'이라 하고 우측 방은 '이운재'라 하며 당(堂)과 재(齋)를 포함한 정자 전체를 통칭할 때는 '추월한수정'이라 한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동경 지도원은 "종택 뒤편에 자리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는 퇴계 선생의 삶과 학문을 배우고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며 "수련원 입교생들은 반드시 퇴계종택을 찾아 종손으로부터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 등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노송정 종택, 조선 대유학자 태어나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 종택은 조선 대유학자인 퇴계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때문에 이곳을 퇴계태실(退溪胎室'경상북도민속자료 제60호)이라고도 부른다.
이 집은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1424~1488)의 종택으로 단종 2년(1454) 가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으며 이후에 '몸채의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퇴계가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태실'이라 부른다.
이계양은 선산부사 이정의 아들로 자는 달보(達甫), 호는 노송정(老松亭)이며 1453년에 30세로 진사가 됐다. 후에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됐다. 퇴계 선생은 어릴 적 이계양의 둘째 아들인 송재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려고 태실에서 청량정사까지 걸어다녔다.
몸채는 '口'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퇴계태실이 돌출돼 있고, 동남쪽 모서리에 마루를 두어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분리돼 있다. 마루 상부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몸채 동쪽에는 '一'자형 평면의 노송정이 자리 잡고 있고, 사당채가 있다.
대문은 '성림문'(聖臨門)이다. 성림문은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1470~1537)가 꿈에 공자가 문 앞에 오신 것을 기념해 후대에 이름 지은 것으로 기문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풍모를 지니면서 태실(胎室)과 같은 특이한 방을 둔 집이다.
이곳에는 별당형 정자에 노송정 외에도 '옥루무괴'(屋漏無愧'혼자 있어도 부끄러움 없게 함), '해동추로'(海東鄒魯'퇴계가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 등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수졸당 종택, 충절의 하계마을에 우뚝 서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수졸당 종택(守拙堂 宗宅'경상북도민속자료 제130호)은 퇴계 집안의 조선 문과 급제자와 구한말 항일독립운동가 등 절반을 배출한 하계마을에 우뚝 서 있다.
이 집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1559∼1637)와 그의 아들 수졸당(守拙堂) 이기(李岐'1591∼1654)의 종택이다. 동암공은 조선조 명종 때 청백을 신조로 산 인물로 여러 고을을 거쳐 원주목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의 공로와 광해(光海) 혼조시에 의리를 지킨 공으로 증직돼 이조참판에 올랐다.
수졸당이 있는 하계마을은 도산면 소재지에서 퇴계 종택을 지나 1㎞ 거리에 있다. 마을 앞으로는 청량산을 지나온 낙동강이 흐르고, 그 남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또한 이 마을을 지나 강을 끼고 약 1㎞ 올라가면 이육사의 고향인 원천리에 도달한다. 현재 그곳에는 이육사기념관이 건립돼 있다.
또 수졸당 바로 뒷산에는 퇴계의 묘소가 있다. 유서 깊은 하계마을은 오랫동안 15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10여 호 정도만 남아있다. 향산고택'계남고택'정언댁은 외지로 옮겨졌고 수졸당'새영감댁'초산댁'수석정과 백동서당만 남아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퇴계 후손들의 전체 문과 급제자 33인 가운데 거의 절반에 달하는 15명의 급제자를 배출했고 25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진성이문 퇴계가의 중심 마을이다.
3대 독립운동가의 중심인물인 향산 이만도는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지도자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열어 제자들을 교육하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창의해 의병대장에 추대됐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당하자 이를 막지 못한 죄인을 자처하며 24일간 단식 후 순국했다. 또 그의 며느리인 김락 여사 등 숱한 항일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수곡암, 유교와 불교의 융합과 통합 모델되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 종가 뒤편 퇴계 선대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재사(齋舍)인 수곡암(樹谷庵). 이 암자는 퇴계 선생이 50세 되던 해 집안 묘소를 관리하고자 용수사의 설희(雪熙) 스님에게 부탁해 지었다고 전한다.
노송정 종가 이창건(62) 종손이 건넨 수곡암 기문에는 '동당(東堂)은 유생이, 서당(西堂)은 설희 스님이 거처한다'는 내용과 재사에 불교 건물에 붙여지는 '암'(庵)자를 붙인 것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에 대해 이동건 영남퇴계학회 이사장과 이동승 전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는 정리(情理)라고 해석했다. 묘소 앞에서 지내는 제사의 법도는 원래 종가의 의례였으나, 지파의 후손이 참석하는 것을 정리상 나무라지 못하듯 나라의 억불정책에도 몸과 마음으로 체득된 불교와의 인연을 무자비하게 끊어내는 것은 선비의 처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퇴계 선생의 '불교수용관'이었다는 것.
경기대 김창원 교수도 자신의 글 '도산십이곡의 형상 세계와 불교'를 통해 유학과 불교의 융합, 퇴계 선생의 철학 속에 녹아 있는 불교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글에서 서당과 정사보다 후대 형태인 서원이 본격화되기 전 유림들은 대체로 자신의 거주지 인근의 한적한 사찰이나 암자에서 독서했으며, 그러다가 아자를 개축해 서당 또는 정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퇴계 이황의 집안에는 두 곳의 분암(墳庵'선영 인근에 지어 재를 지내고 묘지를 관리하던 역할)이 있었다. 고산암(孤山庵)은 첫째 부인 김씨 분암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수곡암이었다.
도산서당이 지어지기 전 이곳은 퇴계 선생이 독서하고 공부하면서 쉬었던 곳이다. 분암과 정사에는 대부분 스님들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김창원 교수는 글에서 "서당 및 정사는 양반들의 독서처였던 절과 암자의 연장에서 지어졌다. 그것들 대부분 스님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졌으며 도산십이곡이 담아내고 있는 불교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최성달 안동시 역사기록관은 "이처럼 조선 최고 유림인 퇴계가와 불교인 용수사를 둘러싼 융합과 통합이 시대를 넘어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에라도 수곡암을 문화재로 지정, 보호 관리하는 방안 마련이 절실하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전종훈기자 cjh4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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