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명수의 집중 인터뷰] 신작 '잘가요 엄마' 낸 소설가 김주영

"소설 세 편쯤 더 쓰고 독서·여행…'길 위의 작가 삶' 버리진 않

작가 김주영이 '잘가요 엄마'로 소설가로 돌아왔다. 2010년의 '빈집' 이후 2년 만이다.

"'잘가요 엄마'는 한마디로 어머니에 대한, 어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전에 내놓은 '홍어'와 '멸치' '천둥소리' '빈집'도 모두 어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다. 아닌 것도 있지만 응당 어머니를 잘 모셔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데 대한 회한과 참회하는, 그런 소설이다."

5월 출간된 지 한 달여 만에 소설은 이미 4만여 부가 나갔다. 그는 "이 소설이 아주 잘 쓰여졌다기보다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단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장편 역사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은 '길 위의 작가'로 불릴 정도로 끊임없이 현장을 찾아다니고 여행하고 민초들의 삶을 경험한다. 그는 이 소설과 더불어 낙동강 700리를 오르내리면서 기록한 '고향 물길을 거닐며'라는 책도 냈다. 자신의 고향이자 문학의 기반인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사람과 역사, 문화 등 모든 것을 사진작가 권태 씨의 빼어난 사진과 함께 담았다. 칠순이 넘은 그는 여전히 왕성한 감수성으로 평생을 함께해 온 역마살을 감추지 않으면서 다시 길을 떠났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를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재단 이사장실에서 만났다.

◆잘가요 엄마

'잘가요 엄마'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소설 속 어머니, 화자의 관계와 이야기는 자전적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고백적이고 그런 면에서 어머니의 본질을 탐색하는 그런 소설로 봐줬으면 좋겠다."

소설 속 어머니는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 어머니는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희생이다. 자식을 결혼시키고도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하는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당신 자신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보름달이 떠오르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는 기도하는데 자신의 몸과 건강은 만신창이가 돼 있는데도 내 몸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과 남편 잘 되게 해달라고 빈다."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고 했지만 소설 속 에피소드들은 충격적인 가족사다. 그는 사실상 이 소설을 통해 평생 스스로를 가둬 놓은 '누추한 가족사'라는 감옥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을 썼다. 누구나 털어놓고 공개하기를 주저하는, 부끄러운 가족사를 소설을 통해 '까발림으로써' 그는 용감하게 감옥에서 탈출한 것이다.

"안동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양반이라든가 벼슬 등 집안 이야기를 자랑삼아 얘기하지만 저처럼 누추하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그의 가족사는 그동안 그를 옥죄어 온 가슴속 족쇄이자 감옥이었다."

사실 김 이사장도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룻밤에 단편소설 한 편 정도를 단숨에 쓰던 사람이 900장밖에 안 되는 소설 한 편을 쓰는데 무려 1년 반이 걸린 것은 그만큼 이 소설의 중요한 뼈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느냐, 고민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는 왜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제 나이가 올해 일흔셋이다. 석양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한 늙은이를 연상하게 될 나이다. 이 소설을 쓰는 데 제 나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숨은 신만이 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다. 이제 내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버림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사고로 나머지 여생을 살아갈 방법이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한 것이다. 마흔이나 쉰 정도였다면 아마도 이런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적당히 허세도 부리고 출세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은 감추고 싶을 테고, 나 스스로를 훼손시키는 그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잘가요 엄마' 이전에 쓴 소설에 나온 어머니는 심하게 말하면 '가짜 어머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송 진보

그는 청송 진보에서 태어났다. 진보는 그의 소설의 토대이자 토양이었다. 요즘도 5일장이 서는 '진보장'에서 본 모든 것들은 소설 '객주'를 쓰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옛날에는 진보장터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 집은 그 진보장이 멀리 보이는 곳에 있었다. 우리 집이 어릴 때 내게 수치심을 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개가를 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울타리가 없는 누추한 집에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울타리가 없는 집에 누가 찾아와서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면 누추한 방 안이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노출된다. 가구도 없이 사과 궤짝 하나 갖다 놓고 사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노출의 비애'다. 담이나 울타리가 있으면 바깥세상과 안 세상을 구분할 수 있는데 우리 집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원망하지도 세상에 앙심을 품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자는 깡패가 될 애가 글을 쓴다'고 대견스러워했다."

그것은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태평때기(댁)'로 불릴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의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오늘 당장 저녁 끼니가 떨어져도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 끼니를 구하지 못하면 굶으면 되고 날이 밝아 나가서 일을 하면 두 식구 먹을 곡식 한 됫박 정도는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하태평이었다.

김 이사장의 어머니는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흔넷이었다. 평생을 가난하게 험하게 사신 어머니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평생 기름진 것을 드시지 못하신데다 평생 먹고살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낙천적인 성격으로 남의 일에 절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런 모든 점을 쏙 빼닮았다는 그의 말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런 고향에서의 기억들이 김주영 문학의 바탕이자 끝이다. 7월 13일 그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지원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위해 고향 마을을 찾기로 했다. 장날을 맞은 진보장에서 그는 '그리워하면서도 저주하고 멀리하려고 애를 쓰다가 다시 그리워하던' 기억 속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진보로 되돌아갈 것이다.

◆'길 위의 작가'

'객주'에 대해 다시 물었다.

"역사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객주라는 역사소설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조선 후기 상업사에 대한 논문 100여 편을 읽었지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후끈 달아올랐다. 일본까지 찾아가서 헌책방을 뒤져 읽었고 현장조사도 다녔다. 전국의 장터란 장터는 안 다녀온 곳이 없다. 조선시대 장터 이야기였지만 산천은 지금과 똑같다. 간첩으로 오인받아 두 번이나 잡혀가기도 했다. 그때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있지 못한다."

현장을 꼭 확인해야 하는 버릇은 고려시대 정중부의 난을 다룬 소설 '화척'을 쓰다가 절필하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고려시대 개성 지도를 그렸는데 북한땅이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대사관의 지인을 통해 북한 측과 접촉했는데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한참 지난 후 다른 기회를 이용해 북한에 갈 수 있게 되자, 그는 결국 개성을 방문해서 시가지를 둘러본 후 각종 자료를 통해 만든 자신의 당시 개성지도가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후일담도 털어놓았다.

지금 그는 '객주' 10권째를 쓰고 있다. 내년 2, 3월이면 출간될 것이다.

10권은 경북 울진에서 내성장(지금의 봉화)을 드나들던 보부상 이야기가 중심이다. 울진 출신인 한 지인이 울진에서 내성까지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보부상길을 소개하자 객주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공천심사를 한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할 때는 대통령 취임사를 다듬은 적도 있다. 그렇다고 민주당 지지 성향이나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갖고 있지는 않다.

어릴 때부터 살아온 전력 자체가 밑바닥에서 왔다갔다해서인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경도된다. DJ나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그는 '보수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문열 씨가 한나라당 공천심사를 할 때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진보고 뭐고는 모른다. 다만 내 양심에 비춰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 작은 능력을 보탠다는 것이 내 각오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당시 휴가 나왔다가 보안사 사찰과 관련한 양심선언을 했던 사람이 공천을 신청하자 '병역의무를 하지 않은 사람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해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공천을 받지 못하게 했다.

그는 '객주'를 빼고 앞으로 소설 세 편 정도는 더 쓰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여행에 할애할 작정이다. 그리고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나서는 '길 위의 작가'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을 것 같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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