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51> 천정락 대구시립극단 단원의 영일 죽장면 봉계리

바닷가 동네라 오해 말아요 하늘아래 첫 산촌

내 고향은 포항시 죽장면 봉계리. 보현산 자락이 뻗어 내린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릴만한 두메산골이다.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시골뜨기가 배우(俳優)가 되어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고향 산촌아 고맙다. 고향의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이 있어 난 행복한 배우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 고향은 포항시 죽장면 봉계리. 보현산 자락이 뻗어 내린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릴만한 두메산골이다.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시골뜨기가 배우(俳優)가 되어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고향 산촌아 고맙다. 고향의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이 있어 난 행복한 배우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천정락 연극인
천정락 연극인

고향(故鄕)이라!

여름 땡볕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다 멱 감으러 뛰어든 옥색의 물웅덩이나, 오솔길 한쪽에 송송 솟아 올라오는 샘물 같다. 또는 가을걷이가 끝난 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금동아, 밥 먹어라" 부르시는 어머니의 정겨운 소리에 문득 돌아다본 마을 풍경,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나무 사이로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같이 아련하다.

처가(妻家)는 서울이다.

올해 85세이신 장모님께선 일제 강점기 때 학교를 다니셨던 분인데 그때 그 시절 얘기를 사위랑 대화하는 걸 들으며 처(妻)는 아주 신기해한다. 물론 장모님께서도 놀라신다.

"자네 나이에도 그런 게 있었나?"

"그럼요."

장모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그 깡촌에서 촌놈이 출세했네, 자네" 하시며 또 웃으신다.

막내 사위가 그런 얘기를 하니 귀엽다 하신다.

난 자랑이라도 하듯이 신이 나서 "그뿐인가요? 저녁에 장작으로 소죽 끓이고 나면 그 숯불을 화로에 담아 조부모님이 계신 사랑채로 들이는 일을 제가 담당했었죠."

불씨 좋은 화로를 들고 사랑채에 들이면 조부님께선 헛기침을 하시고,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으시곤 긴 곰방대에다 말린 담뱃잎 가루를 엄지로 꾹꾹 눌러 화롯불에 불을 댕기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피어오른다.

늦가을 사랑채에서 할머니 무릎에 누워 홍시가 지붕 위로 떨어져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앞산을 바라보다 산토끼 떼들이 이동하는 걸 보면서 몹시 흥분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어린 나에게 신기한 장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누구나 비슷한 고향의 추억들이겠지만 다들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들이리라.

산소에 벌초를 하거나 성묘를 위해 고향마을 어귀에서 보이는 베틀봉이 보이면 가슴이 아련한 것이 형언할 수 없는 찌릿한 감동이 밀려오고 한동안 마을을 바라보면 멍하니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먹을 게 많이 귀했던 시절.

어머니께서 나물 하러 가셨다가 물오른 소나무 끝 부분을 잘라 오시면 낫으로 껍질을 얇게 벗겨 내고 속껍질을 먹으면 솔 향이 가득한 것이 지금도 미소가 떠오른다.

참꽃을 따서 먹고 찔레 새순을 꺾어 먹고, 지천에 깔린 감꽃이 떨어지면 그걸 엮어 목걸이 만들어 놀다가, 감이 굵어지면 고추 말리는 고추 굴에다 삭혀서 우적우적 씹어 먹던 달짝지근한 기억.

우리 집의 보물 1호인 소를 몰고 소꼴 먹이러 가서 소는 산에 풀어놓고 친구들과 평평한 곳에서 레슬링이며 숨바꼭질이며 놀다가 오디, 산딸기 따 먹고 손이며 입술이 보라색으로 물들어도 그저 행복했던 친구들.

저녁이면 호야등 켜고 가재 잡으러 갔던, 마당에 멍석 깔고 모깃불 피워놓고 감자 옥수수 먹던, 겨울이면 장작이며 땔감을 지게에 지고 뒤안에 재 놓고 소죽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하고 누룽지를 긁어 십 리나 되는 학교에 걸어가면서 먹던 일, 무 서리 밀 서리.

정월 대보름이면 친구들과 이집 저집 몰려다니며 오곡밥 얻어 누구네 집 밥이 맛이 있는지 다 먹어 보고(백가반-百家飯) 달이 뜰 시간이면 연기 피워 올리러 뒷산으로 형님들 따라갔었던.

큰누님 혼례 올린다고 며칠을 잔치 준비에 사람들로 북적대고, 어린 난 그저 신이 났었고, 첫날밤 치르는 날 동네 사람들이 한지로 붙여놓은 문을 문살만 보일 정도로 구멍을 뚫어 놓아 어머니께서 애달아 하셨던 기억들이 또 한 번 미소 짓게 한다.

"금동이 왔나?" 부르는 소리에 퍼뜩 추억 속에서 빠져나오면 허리가 꾸부정하신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우리 집에 들어 와가 밥 먹고 가거래이" 하신다. 고향 친구 영복이 어머니시다. 세월의 격세지감에 한숨이 나온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봄이면 지붕을 짚으로 다시 올리곤 하던 초가집이 사라지고 전기란 것이 들어왔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호롱불을 켜고 살던 나에겐 신기한 문명의 첫 경험이었다.

주소가 경북 영일군 죽장면 봉계리였던 시절에 고향이 영일이라고 하면 다들 바닷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고향 죽장면 봉계리는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렀을 정도의 산촌(지금은 그런 곳을 오지라 부른다)이었지만 지금은 '죽장 사과'하면 꽤 알아주는 상품이 되었고 그 덕에 죽장(竹長)이라고 하면 아는 분들이 더러 계신다.

가시오가피, 산나물, 고로쇠, 가을이면 능이버섯 등이 유명하여 봄여름가을 외지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여름이면 텐트촌으로 변하는 입암(立岩) 28경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이 시작될 무렵 그 두메산골 봉계리에서 대구로 유학이라는 걸 가게 되면서부터 나의 향수병(鄕愁病)은 시작된 것 같다.

가방을 싸서 대구로 출발하던 날 이른 아침, 어머니는 해마다 당산나무에다 새끼줄로 칭칭 감아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꽂아 놓고 당제(堂祭)를 지내던 그 오래된 당산나무 아래에 가서 큰절하고 가라고 하셔서 절 두 번 하고 떠났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고향은 추억의 보물창고이며 정서(情緖)의 실타래 같아 하나씩 꺼내거나 풀어서 내 몸을 칭칭 감아보면서 친구들을 떠올리고 그 장소를 떠올리며 혼자만의 시간에 행복해한다.

이렇게 자연에서 얻을 수 있었던 기억과 추억, 경험들이 배우(俳優)로서 작품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방학이 다가오면 고향 갈 생각으로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 장소가 그리웠다. 처음 부모님을 떠나 대구로 전학왔을 때 남몰래 눈물도 참 많이도 흘렸었다. 도무지 도시라는 곳은 나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곳도 나의 고향과 가까운 하양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많지 않은 고향의 향수를 꼭 붙들어 매고 싶어서인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세월이 지날수록 모내기철 그렇게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보다 더 커져 간다. 고향 사람들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어떤 것들이 나의 정서만큼이나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으매 풀어진 고향의 실타래로 칭칭 감아 보물창고에 넣어두고 싶다.

올여름 휴가 때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놀았던 그곳으로 가서 아들 녀석과 멱 감으러 가야겠다. 그 옛 추억을 더듬으며 베틀 바위에도 올라가야겠다.

고향의 바람을 맞으며 외치리라. "봉계리의 50세 되는 막내, 김영철 형님! 사과 농사 잘 되길 바랍니데이."

천정락 연극인

사진'김태형기자 @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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