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에서 산을 지키며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한다는 '산신령'에겐 세 가지 취미가 있었다.
첫 번째 취미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산봉우리를 오르고, 숲 속을 마구 질주하는 것이었다. 이 취미는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점점 사라지면서 없어졌다. 두 번째 취미는 선계(仙界)에서 흔하게 나는 금, 은과 속세에서 흔하게 나는(반대로 선계에선 귀한) 고철을 맞바꾸는 고철 수집이었다. 주로 산속 연못에 잠수해 있다가 나무꾼들이 들고 오는 쇠도끼를 노렸다. 이 취미 역시 우리나라에 나무꾼 직업이 점점 사라지면서 없어졌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취미는 아직 이어지고 있다. 산속 여기저기에 보물을 숨겨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 보물을 찾으러 오는 속세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산속 생활의 따분함을 달랜다. 효자'효녀나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며 가끔 선녀들이 선계 통신망의 '칭찬합시다' 코너에 글을 올리면, 산신령이 직접 당사자 꿈에 나타나 산으로 오게 한 다음 보물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 보물은 바로 '산삼'이다.
최근 산신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일주일 내내 산속을 헤매며 산삼을 찾는 이들이다. 산을 찾을 때마다 술, 과일, 떡을 가져와 자신을 위해 고사를 지내주고, 산삼은 물론 각종 약초를 채취해 몸이 허약한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산속 깊숙한 곳에 이렇게 멋진 경치가 있다"며 홍보까지 해주니 고맙다는 것.
이들이 누구인지 하도 궁금했던 산신령은 급기야 매일신문에 제보해 취재를 부탁했다. 그래서 취재진이 직접 '신세대 심마니들'을 만나고 왔다.(지금까지 가상의 이야기였으니 독자 분들은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심'보러 산속으로
이달 26일 오전 9시쯤 경북 구미의 한 야산 입구에 6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구경북에서 '산삼 캐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심마니들이다. 모임 대표 황재호(35) 씨, 함께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황영봉(31) 씨, 그리고 회원인 김회연(58)'옥춘섭(53)'김창식(53)'김준현(40) 씨다.
"오늘은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산삼을 캐러 왔습니다. 대구경북은 물론 충청도, 강원도 등 전국 어디든 갑니다. 일주일씩 산에 텐트를 치고 산삼을 찾는 경우도 있어요."
멀찍이서 산을 둘러보던 이들은 서둘러 심마니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등산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험한 산행에 상당히 기능적인 복장이었다.
일단 더운 여름임에도 긴팔 상의에 긴 바지, 긴 양말을 착용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긴 장화, 안전화나 등산화에 덧대는 장비인 스패츠 등을 착용하는 것이다. "심마니들에게 가장 성가신 것이 뱀의 습격입니다. 뱀이 주로 발목 부위를 물기 때문에 발목을 덮어 보호하는 신발이 필수죠."
짊어진 배낭 한쪽에는 물병을, 반대쪽에는 휴대용 살충제를 챙긴다. 휴대용 살충제는 뱀만큼 성가신 벌 떼가 나타나면 뿌려 물리치기 위해서이다.
험한 숲길을 헤쳐나가기 위해 곡괭이도 필수로 챙긴다. 배낭에 '쏙' 들어가는 가벼운 조립식 곡괭이다. 곡괭이는 멧돼지 등 산짐승이 나타났을 때도 요긴하다. "곡괭이를 들고 멧돼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멀리서 산짐승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면 곡괭이로 땅바닥이나 나무를 '툭툭' 쳐서 소리를 내요. 그러면 산짐승도 알아서 피해갑니다."
산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휴대용 무전기와 GPS(위성항법장치)도 챙겨야 한다. 심마니들은 산에서는 각자 흩어져 돌아다니기 때문에 휴대용 무전기로 수시로 연락을 취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산속에서 전파가 터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쪽 어깨에는 채취한 산삼을 담을 수 있는 둥근 모양의 '도면통'을 메고 간다. 원래 종이 서류 등을 말아 넣는 용도로 쓰이지만 산삼 잎과 뿌리를 훼손 없이 담는 데도 유용하다. 이렇게 심마니들은 입산 준비를 마쳤다.
◆심봤다!
오전 9시 30분쯤. 등산로를 걷던 회원들은 갑자기 길옆 숲 속으로 방향을 꺾었다. 선두에 있던 영봉 씨가 곡괭이로 수풀을 헤치며 길을 만들었다. 좀 더 들어가다가 커다란 바위 앞에 멈춰선 이들은 준비한 술과 과일 등으로 간단한 고사상을 차려 '입산제'를 지냈다.
"좋은 '심' 보게 해주십시오. 채심하여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회원들은 세 번 절을 하고는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각자 배낭에 술을 한 병씩 챙겼다. "음주 산행을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산삼을 발견했을 때 즉석에서 고사를 지내기 위해서죠. 산신령님이 좋아하실 만한 술이라며 각자 막걸리나 소주 등을 고릅니다." 산신령에게 신고 절차를 마친 회원들은 각자 흩어져 본격적인 산삼 탐색에 돌입했다.
재호 씨는 "산삼이 주로 나고, 또 약효 역시 특출한 지역이 있다"고 말했다. 대구와 경북 구미 주변은 물론 충북 괴산과 보은, 강원 인제, 홍천, 양구 등의 지역을 꼽았다. 더운 기운이 많은 지역은 같은 수령의 산삼이라도 약효가 더 좋다는 것.
산속에서 산삼이 주로 나는 위치가 따로 있다. 재호 씨는 북쪽 방향의 그늘진 산비탈을 손으로 가리켰다. "산삼은 '반음지 식물'이라 하루에 조금만 햇빛을 받아도 왕성하게 광합성을 합니다. 은둔이 특기인 식물이죠. 그런 습성 때문인지 북쪽 방향의 그늘진 산비탈에 주로 숨어 있습니다."
재호 씨는 "산삼은 한번 났던 곳에 또 난다"고 했다. 산삼이 나는 것은 최적의 환경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고, 그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산삼이 대를 이어 뿌리를 내린다는 것. "우리 선조들이 예부터 산에 뿌려 둔 장뇌삼 씨앗이 새나 산짐승 등의 먹이가 되고 다시 배설되는 과정을 거치며 야생 산삼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환경 조건만 되면 전국 어디든 산삼이 퍼져 자랄 수 있고, 이는 심마니들이 전국을 누비는 이유가 된단다.
재호 씨를 따라 산골짜기를 비집고 다닌 지 3시간쯤 지났을까. 산 중턱 한 비탈진 바위 아래 그늘진 곳이 재호 씨의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본능적으로 재호 씨의 눈이 빛났고, 걸음도 빨라졌다. 가서 확인해보니 하나의 줄기에서 균형 있게 퍼져 나온 푸른 잎들이 푸른콩 같은 열매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산삼 세 뿌리가 나란히 있었다.
"심봤다!" 재호 씨가 큰 소리로 외치자 다른 회원들은 서로 무전기로 바삐 연락을 취했다. 이내 재호 씨 주변으로 모여든 회원들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산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신세대 심마니들
'산삼 캐는 사람들' 회원들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신세대' 심마니인 까닭은 각자 산삼을 캐고, 산행을 하는 이유가 전통적인 심마니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재호 씨와 영봉 씨는 회사 동료였다. 7년 전 우연히 산삼을 캔 것을 계기로 산삼 채취에 푹 빠져 함께 사표를 던지고 전업 심마니가 됐다. 하지만 여느 심마니들과는 다르다. 산삼, 약초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게 목표인 것. 그러기 위해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전국 각지 심마니 모임을 좇아 다니며 산과 산삼에 대해 진득하게 배웠다. 그러면서 노하우를 익혔고, 2008년 인터넷에 '산삼 캐는 사람들' 카페를 만들었다. 특히 재호 씨는 현재 산삼감정사로 활동할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창식 씨는 8년간 약초만 전문으로 산을 찾아다니다 모임에 동참했다. 산행 중 약초를 발견하면 이름과 효능을 줄줄 외울 정도인 그는 "산에서 나는 모든 식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산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연'춘섭'준현 씨는 각자 직업이 있지만 '웰빙 노후'를 위해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회연 씨는 "노후에 산에 들어가 살고 싶다. 그러려면 산을 알고, 산에서 나는 산삼, 약초 등 각종 식물에 대해 알아야 산속 생태계와 한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춘섭 씨는 "산을 오르다 산삼과 마주칠 수 있다는 설렘만으로도 좋다"며 "직접 캔 산삼을 위암과 투병 중인 지인에게 최근 선물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다. 노후에 산과 함께라면 특별하고 행복한 일만 가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준현 씨는 올해부터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새내기다. 그는 "산행을 즐기는 인구가 늘고 있다. 따라서 이왕이면 산에 대해 많이 알고 찾아가 산을 즐기는 것이 향후 중요한 산행 소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산행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주말마다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는 직장인 박주용(36) 씨는 모임에 대해 "산삼과 약초도 캐고, 산행도 즐기는 '산삼 레저'인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말마다 산행도 즐기고, 산삼과 약초에 대해 전문 심마니들 못잖은 지식도 쌓고, 끈끈한 친목 모임도 갖는 등 일석삼조의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재호 씨는 자신들이 신세대 심마니를 자처하지만 심마니 전통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했다. 입산 일주일 전부터 살생을 하지 않고, 문상도 가지 않고, 목욕재계를 하는 등 전통적인 절차를 지키는 것이 한 예다. "심마니가 산을 찾을 때 가지는 경건하고도 간절한 마음은 전통으로 계승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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