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북한 인민군은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포항'대구'마산'부산을 잇는 최후의 사각형 지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임시 수도인 대구 도심은 전선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 포성도 가까이 메아리쳤다. 북쪽에서 밀려든 피란민들의 행렬이 밀려들어 대구의 주민 수는 250만 명을 넘었다.
같은 시기, AFP통신사 사장 모리스 네그르는 파리의 사무실로 기자 셋을 불렀다. 앙리 드 튀렌, 필리프 도디, 장 마리 드 프레몽빌. 모두 서른 살 미만의 젊은 기자들이다. 네그르가 불쑥 물었다. "한국에 가고 싶지 않나?"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가고 싶습니다." "좋았어 그러면 당장 내일 아침에 떠나라고. 팬아메리칸 비행기에 자리를 잡아놨어."
'한국전쟁통신'은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이 한국전쟁 당시 전선 곳곳의 생생한 현장을 보고 쓴 기사들을 한데 묶은 책이다. 한국에 있던 종군기자들 사이에서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서울 수복과 1'4후퇴, 1951년 3월 서울을 다시 탈환하기까지 한국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8개월 간 전장 곳곳을 누볐다. 일간지 '르 피가로'의 특파원 세르주 브롱베르제도 뒤늦게 이들과 합류해 전체 르포기사의 편집과 정리를 맡았다. 1951년 책으로 펴낸 이 책은 그해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문학에 수여하는 '알베르 롱드르' 상을 받았다.
저자들은 낙동강 전선의 보루였던 대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침침한 골목 양쪽으로 거적을 덮은 토끼장 같은 움막들이 늘어서 있다. 도로 한 복판의 작은 도랑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더러운 오물이 흘러내린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전략적 도로를 따라 10m 거리마다 서 있는 한국 경찰들은 주민의 통행을 제지하고 피란민들을 한군데로 몰았다. 각 도로의 입구에서 소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병사가 길 맞은편의 사촌을 만나러가거나 식료품 가게로 장을 보러 가려고 기웃거리는 주민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피란민들은 거적때기 천막 앞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전선으로 올라는 병사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저자들은 전쟁의 참화에 신음하는 한국인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본다.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위해 새벽부터 대구역 앞은 노인과 여자, 아이들로 가득하다. "피란으로 바짝 마른 아이들의 얼굴, 포기한 군중을 플랫폼에 남기고 만원열차가 떠난 뒤 이제 곧 다시 길을 걷다 탈진해 버릴지 모르는 말없는 가족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르포기사인 만큼 전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도 돋보인다. 저자들은 보병전을 전개해야할 곳에서 포병과 근접항공지원이 초래한 전술적 실패를 지적한다. 평양 수복 직후 한국인들과 인터뷰를 통해 전쟁을 겪는 한국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기울인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종군기자들도 숱하게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석 달 만에 12명이 희생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서도 특파원 희생자는 40명이었다. 저자 중 한 명인 장 마리 드 프레몽빌도 1951년 2월 북한군의 기관총 세례에 목숨을 잃었다. '한국에서의 전쟁'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여기자 마거렛 히긴스와 종군기자로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인 랜돌프 처칠의 일화도 눈길을 끈다. 320쪽. 1만5천원.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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