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선 어떤 의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정국의 주도권이 바뀌기 마련이다. 이슈를 선점해 대표 브랜드를 만들면 정국을 이끌고 가기가 쉽다. 여기에 국민적 동의만 얻는다면 백전백승이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회의에서 당 지도부가 의제를 제시하고 상대 당을 공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우여 대표, 이한구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가 민주당 '이해찬-박지원 호'에 비해 경량급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해찬 대표는 '전략의 귀재'로, 박지원 원내대표는 '저격수'로 널리 알려져 집권 여당이 판판이 끌려다닐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일하지 않으면 세비도 받지 않겠다며 내놓은 새누리당의 '무노동 무임금'은 국회 선진화, 국회의원 쇄신이라는 바람을 일으켰지만 적절한 용어가 아니라는 당내 비판이 제기됐다. 대구의 한 초선 의원은 "솔직히 무노동 무임금은 파업을 일으킨 노동자에게 적용하는 제재수단이 아니냐. 원칙적으로 말하면 '무개원 무세비'"라며 "앞으로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용어 때문에 번번이 발목 잡힐 게 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 원내대표가 '부산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 씨가 박근혜 전 새누리당 대표 측에 로비를 했을 것'이란 의혹을 제기한 뒤 새누리당의 대응도 어설펐다. 민주당은 '저축은행 로비'라는 의제를 만들었는데 새누리당은 '박 전 대표와 박 씨가 만난 적이 없다'고 대응하면서 '로비를 했느냐' 여부가 '만난 적이 있다, 없다'는 틀에 갇혀 진실 공방으로 이어졌다. 박 전 대표 측과 박 원내대표 측이 서로 맞고소했지만 여론전에서 보면 박 원내대표가 박 전 대표의 흠집 내기에 성공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민주당이 내놓은 의제는 감성적이지만 전략적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이명박근혜'다. 대선정국에서 현 정부심판론이 먹혀들기 위해서는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를 어떻게든 연결시켜야 하는데 이만한 의제 설정이 없다. '이명박근혜'는 소셜네트워크(SNS) 상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반(反) 보수의 구호가 됐다. 민주당은 지난해 치러진 서울시의 학교급식비 지원 범위 결정을 위한 주민투표에서도 '나쁜 투표'라는 의제를 설정해 서울 시민을 설득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감세정책(tax cut)을 '세금 구제'(tax relief)로 명명해 여론의 지지를 얻은 바 있다.
최근 정치권의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민간인 사찰 파문'이라는 의제를 두고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야권의 이름 붙이기, 이른바 '네이밍'(naming'이름짓기)에 여권이 끌려간다는 것인데 여권은 '민간인 사찰'이 아니라 '동향 보고' 등으로 이름을 바꿨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무총리실이든 어디든 역대 정부에서는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왔고 동향 보고는 각 언론사의 필수적 정보 수집 활동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부 관계자가 "일상적인 여론 동향 파악은 경찰청 등 모든 공공기관에서 관례로 해 오던 것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행해졌던 일"이라며 "'민간인 사찰'이라는 이름이 국민의 저항감에 불을 댕기면서 정치 쟁점으로 부상한 사례"라고 지적하고 있다.
같은 의제라도 어떻게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도 한다. 북한에 쌀을 보내주는 것을 '대북 원조'라고 할지 '대북 퍼주기'라고 할지는 순전히 정치세력의 몫이지만 국민이 어느 이름을 대화거리로 삼느냐에 따라 향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두고 '세금 폭탄'이라고 명명해 국민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새누리당이 의제 설정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카피를 쓴 조동원 스토리마케팅 대표이사를 홍보기획본부장으로 영입한 것도 그런 이유다. 민주당은 "빈부격차만 더욱 벌린 이 정부의 실정을 짚어내고 '부자 정당'인 새누리당의 한계, 새누리당 대선주자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부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적극 발굴하고 있다"며 벼르고 있다.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유광준기자 jun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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