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사전 의료 지시서

며칠 전 이메일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니로부터 온 이메일 때문이었다. 곧 여든이 되는 연세에도 자주 자식들에게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를 보내지만 이번 것은 제목과 내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제목은 '사전 의료 지시서'였다.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심스레 내용을 읽어보니 이렇게 시작됐다. '나 스스로의 임상치료에 대한 판단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담당 의료진과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료 지시서를 남기니 내 뜻에 따라주기를 바랍니다.'

그 뒤로 각각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가 따랐다. 요약하면 혹시라도 가망이 없는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을 경우에 단순히 생명 연장만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의료 유언장'이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이 더욱 가슴을 졸였다. '의사인 두 아들에게 깊이 당부한다. 편히 잠들게 해다오.' 자식들이 의사이다보니 갖은 수단을 쓸까봐 더욱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말기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와 의식불명 환자에 대한 생명유지 기술도 따라서 괄목하게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명은 한계가 있고 영원히 사는 사람도 없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연간 사망자 수는 24만7천명으로, 하루 사망자가 677명에 달했다.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배우자나 부모, 자녀의 죽음을 경험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예로부터 '잘 죽는 복'도 오복(五福)의 하나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죽음도 삶의 마지막 부분이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와 궁리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웰다잉'(well-dying), '존엄사' '품위 있는 죽음' 그리고 '소극적, 적극적 안락사'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많은 대중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은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의학적으로 매우 예민한 것들인 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법원에서 이미 존엄사에 대한 허용판결이 나왔고, 의료 유언장인 '사전 의료 지시서'에 대해서는 2007년 한 연구팀의 조사에서 환자의 96%, 의사의 98%가 찬성했다는 통계자료가 있다. 그렇더라도 직접 어머니로부터 그런 문서를 받고 보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어머니'라는 말은 모든 자식들에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어령 님의 '어머님을 위한 6가지 은유'의 한 대목을 옮기면서 위안으로 삼는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않는 삶은, 허깨비 같은 삶이다. 죽음을 염두고 두고 살아가게 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음과 대면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허튼 짓 없이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더욱 애틋하고 아름답고 고맙게 생각하게 되고, 더욱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 호 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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