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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宅은 살아있다] <27·끝> 청송 파천면 덕천마을 청송 심씨 송소고택

구한말 도적 떼에 곳간 털려…남은 재물로 99칸 대저택 완성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지은 송소고택 안채. 만석 부잣집답게 안채 규모가 상당하다. 당시 건물은 7채에 총 99칸의 대저택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지은 송소고택 안채. 만석 부잣집답게 안채 규모가 상당하다. 당시 건물은 7채에 총 99칸의 대저택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문화해설사가 안채에서 담장에 뚤린 구멍을 통해 사랑채를 들여다보고 있다. 담장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 손님을 알아보기 위한 용도로 설치됐다.
문화해설사가 안채에서 담장에 뚤린 구멍을 통해 사랑채를 들여다보고 있다. 담장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 손님을 알아보기 위한 용도로 설치됐다.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자리한 청송 심씨 송소고택. 사왈산이 감싸 안고 앞에는 신흥천이 남북으로 흐르는 명당이다. 덕천마을은 주민들이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송소고택과 나란히 자리한 송정고택과 찰방공종택, 창실고택 등이 1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송소고택, 99칸 이야기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송소고택(松韶古宅'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0호)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지은 집이다. 청송읍에서 진보면으로 길을 따라나서면 과수원과 들길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잠시 감상에 젖을 때쯤이면 왼쪽 산자락 밑에 큰 버드나무가 서 있는 마을이 나온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고추밭에 수건을 쓴 아낙이 허리를 구부리고 김을 매는 모습이 마치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적 작품 '이삭 줍는 여인들'을 연상케 한다.

바로 덕천마을이고, 이 마을 가운데 대궐 같은 집이 송고고택이다. 이 고택은 남동향을 바라본다. 크게 대문채와 안채, 별채와 큰'작은 사랑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며, 각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솟을대문에 홍살을 갖춘 격이 높은 집을 상징했다.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갖추며 7채의 총 99칸으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랑방'상방'대청'안방 2칸'부엌으로 구성되며, 온돌방 윗부분에는 다락이 있어 수납공간으로 사용한다. 안방 안에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문화관광해설사인 최인서 씨는 "안주인이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작은 방에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이것의 유래로 '뒷방 마님'이라는 호칭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었는데, 조상들은 물맛이 좋아야 복덕을 구할 수 있다고 해 물맛이 나쁘면 우물을 다시 파는 수고를 감수할 만큼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안채 앞으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큰 사랑채 입구에는 나무 디딤판이 달려 있다. 보통의 고택에 쓰이는 돌 디딤판과 차이를 보였다. 큰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 마당에는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을 사랑채에서 보이지 않도록 헛담을 두었다. 따로 출입문도 없는 헛담이 'ㄱ'자 형태로 사랑채를 감싸고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빤히 사랑채가 보이는데 내외법이 엄격하던 시절에는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사랑채를 가리는 헛담이 수줍게 두 손을 포개듯 앉아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도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담장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이것을 구멍담이라고 한다. 이 구멍의 수는 사랑채에서 보면 6개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다.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를 45도 각도로 연결해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나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알아보기 위한 용도인 것이다. 별당은 두 채로 별채와 대문채로 되어 있는데, 온돌방 앞으로 누마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송 심씨, 절개의 명문대가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가 넷, 부마가 넷, 정승이 열셋으로 전통적인 명문대가다. 청송 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고려시대 때 종9품 문관의 품계)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받들고, 그의 증손인 덕부(德符)와 원부(元符) 등 크게 두 가문으로 나뉜다. 덕부는 고려 말 왜구토벌의 공훈을 세우고 위화도회군을 도와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을 거쳐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청성(청송의 옛 지명)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부는 정몽주와 길재 등과 더불어 새 왕조의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가 유훈을 지키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보였다. 현재 청송에 흩어져 사는 후대들은 대개 원부의 후손이 많다. 송소 심호택의 둘째 아들 송정(松庭) 심상광(沈相光)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고 청송향교의 전교를 2회에 걸쳐 맡은 학문이 뛰어난 유학자로 지금도 매년 유생들이 송정학계를 열고 있다.

◆9대를 내려온 부호 심부자(父子), 심부자(富者)

심부자의 재력은 9대째 약 300년간 2만 석이었으며 해방 전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2만 석을 가질 만큼 부자였다고 한다. 심부자는 구한말 개화기 때는 화폐의 가치가 변동이 심해 나라에서 은화로 납부하라는 명에 따라 안계고을(현 의성군 안계면)에 있는 자기 소유 전답(田畓)을 처리해 은화로 바꾸니 고을의 은화란 은화는 전부 모여질 정도였고, 이것을 본관인 청송 호박골로 옮기는데 그 행렬이 4㎞나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은화를 옮기는 날, 집에 도적 수십 명이 들이닥쳐 보이는 대로 집을 부쉈다고 한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피신하고 백발의 안방마님(심호택의 母)이 혼자 집을 지켰는데, 마님은 횡포를 부리는 도둑들에게 '물건을 훔치러 왔는데 집은 왜 부수는가'라며 호통치고는 곳간을 열어 주며 '가져가고 싶은 대로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수십 명의 도둑은 모두 한 짐씩 가져갔고, 남은 돈으로 이 송소고택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오니 얼마나 부호인지 짐작이 간다.

◆천천히 볼만한 슬로시티 '덕천마을'

국제슬로시티연맹은 지난해 6월 25일 폴란드에서 열린 2011국제슬로시티총회에서 국내에선 9번째, 세계에선 143번째로 송소고택이 있는 덕천마을 전체를 슬로시티(Cittaslow)로 인증했다.

80여 가구 180여 명이 살고 있는 덕천마을에는 송소고택을 비롯해 여러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송소고택의 별채와 연결되어 있는 송정고택(청송군향토문화유산 제18호)은 심호택의 둘째 아들 송정 심상광이 송소고택과 연이어 지은 집으로, 송소고택과 더불어 고택체험과 여러 가지 천연염색 체험을 할 수 있다. 송소고택과 담장을 이웃하는 찰방공종택(청송군향토문화유산 제13호)은 심원부의 9대손인 찰방공(察訪公) 심당의 종택으로 1933년에 지어진 것이다. 1917년 심호택의 동생 심우택이 분가를 할 때 지어준 창실고택(昌室古宅)도 있다.

청송'전종훈기자 cjh4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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