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세(54) 씨의 집에는 부부의 한 평생이 담겨 있다. 25년 전 방 하나를 얻어 세들어 살았고, 이 집에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차례로 태어났다. 세입자로 산 지 10년 만에 이 집을 샀다. 15년 전 부부는 마당에 무릎 높이의 감나무와 석류나무를 심었고 무럭무럭 자라 지금은 하늘 높이 뻗어있다. 가족같은 집이지만 김 씨는 이 집을 부동산에 내놨다. 집을 팔아 빚을 갚고 나면 이제 어디로 가서 살아야할지 막막하다.
◆갑자기 쓰러진 아내
28일 오후 경산시의 한 단독주택 밀집지역. 자전거를 탄 김 씨가 골목 어귀까지 기자를 찾아 마중왔다. 그의 집은 작았지만 주인의 세심한 관심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휠체어를 타는 아내 윤경희(48·뇌병변장애1급) 씨를 위해 집 현관 앞 계단에 벽돌을 촘촘히 쌓은 뒤 그 위에 나무판을 올려 경사로를 만들었다. 겨울이 되면 찬바람이 스미는 안방 벽에는 은박지를 입혔다. "추우면 춥다고 말도 못할텐데 아내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나잖아요. 집이 오래돼서 겨울에 칼바람이 들어와 따뜻하게 하려고 은박지를 발랐어요."
아내 윤 씨는 활발한 사람이었다. 10년 동안 동네 부녀회장을 도맡아하며 부녀회원들과 함께 동네 일에 발벗고 나섰다. 2010년 4월, 그날도 어르신 무료 식사봉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평소에 아프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윤 씨는 "몸이 피곤하다.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잠에 들었고 그날밤 119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아내와 대화를 한 것도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윤 씨의 병명은 뇌출혈. 병원에서는 "뇌혈관 6개가 터져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씨는 수술만 하면 아내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이런 희망은 사라져 갔다. 대화는커녕 혼자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는 것도 불가능해 24시간 누워만 지낸다. 결국 2011년 3월 뇌병변1급 판정을 받았다.
◆아내를 위해서
아내가 쓰러진 뒤 김 씨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작은 사무실을 차려놓고 건물 리모델링 일을 20년 넘게 했던 김 씨는 24시간 아내 간호를 위해 사업을 접어야 했다. 자영업자인 탓에 퇴직금도 없었다. 네 번의 수술과 장기간 병실 입원 때문에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년 간 발생한 병원비가 6천만원을 넘었다. 지금껏 모아둔 돈은 모두 병원비로 썼고, 집을 담보로 지인들에게 5천만원이 넘는 돈을 빌렸다. 그것도 모자라 십년 넘게 애지중지하던 1t 트럭도 팔았다. 100만원도 안 되는 손에 쥐자 눈물이 났다.
김 씨의 하루는 아내를 기준으로 돌아간다. 아내 배에 연결된 줄로 죽을 먹이고, 목에 가래가 생길 때마다 코에 줄을 넣어 이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의사 표현을 전혀 하지 못하는 아내 때문에 수시로 아내의 건강 상태를 살핀다. 밤이 되면 아내가 자주 소변을 보는데 김 씨는 2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준다. 2년 전부터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다.
하루 4시간씩 윤 씨를 돌보고 있는 요양보호사 서성자(54·여) 씨는 "요즘 세상에 김 씨 아저씨같은 보호자가 없다. 윤 씨는 행복한 여자"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런 김 씨를 도와주는 것은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이다. 주민센터에서 무료로 쌀을 전달 해주기도, 동네 부녀회원들이 집에 들러 "배곯지 말라"며 밑반찬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차가 없는 김 씨를 위해 이웃 주민 박기철(53) 씨는 병원에 갈 때마다 이들 부부를 데려다 준다. 김 씨는 "나 혼자였으면 정말 힘들었겠지만 따뜻한 이웃들 덕분에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갈 곳 없는 정세 씨
현재 김 씨에게 집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인 존재다.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은 기초생활수급자 선정에 걸림돌이다. 이미 집을 담보로 여러 차례 주변으로부터 돈을 빌렸지만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것이 아니어서 여전히 집이 소득으로 잡히기 때문.
아내의 장애등급 때문에 겨우 차상위계층으로 등록돼 의료비 혜택을 보는 정도다. 그간 주위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얼마 전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김 씨는 "요즘 집주인들은 중증장애인이 있으면 세도 잘 안 내준다고 하던데 무일푼으로 어디에 가서 살아야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하다"고 걱정했다.
부양의무자인 큰 아들(23)과 둘째 아들(22)도 걱정이다. 큰 아들은 간 질환, 둘째 아들은 간질 증세가 있어서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서류상 '근로 능력이 있다'고 돼 있는 탓에 기초생활수급자도 될 수 없다. 김 씨는 이런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안방 벽에는 사진 수백 장이 붙어 있다. 강원도 삼척에서 아내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 부부가 큰 아들을 품에 안고 찍은 사진, 사진 속 아내는 젊고 예뻤으며 또 웃고 있다.
그에게도 간절한 소망이 하나 있다. "벌떡 일어나 두 발로 걸어다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내가 대소변 다 갈아줘도 되니까 가족들 알아보고, 나랑 이야기도 나누고 입으로 식사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진 속 아내의 웃음을 꼭 다시 보고 싶어요."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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