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밤마실(이시영)

일머슴처럼 손 크고 덩치 큰 울어매 곡성댁, 마당에 어둑발 내리면 쌀자루 보릿자루 옆구리에 숨겨 몰래 사립을 나섰네. 그때마다 쪽진 머리 고운 해주오씨 우리 큰어머니 안방 문 쪽거울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네 "니 에미 또 쌀 퍼서 나간다"고. 저녁이 다 가도록 밥 짓는 연기 오르지 않는 동무 집이 많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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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 받는 부자로 유명한 경주 최 부자 집의 가훈에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 있다고 하지요. 이 말은 이웃들이 겪는 극도의 가난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지역의 더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귀한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쌀자루 보릿자루 옆구리에 숨겨 몰래 사립을' 나서는 곡성댁과 같은 분들이 주위에 계시어 그 가난한 시절을 모두들 무사히 건너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그 시절이 끝나지 않은 듯하여 이웃의 불빛이 근심스러워지는 저녁입니다.

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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