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이애리수(1)

민족의 연인이었던 배우 출신의 막간가수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끼'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줄곧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는 1930년 '황성의 적'(황성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그 살뜰한 이름을 우리 문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민족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 한 편의 절창을 남길 수 있는 가의 문제가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애리수는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 이름이 '음전'(音全)으로 예능의 끼가 펄펄 넘치는 아이였던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완고한 집안 어른들에게 그리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배우의 기질을 타고난 이음전은 아홉 살 때 김도산이란 분이 주도하던 가극좌에 들어가 아역배우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1933년 경성일보에 소개된 이애리수의 기사는 '귀여운 모습, 명랑한 목소리, 섬세한 연기'등에 대하여 정겨운 풍모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음전이 13세 되던 1923년, 이미 개성 출신의 소녀는 여러 극단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아역배우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대중소설가로 혹은 극작가로 이름 높던 윤백남이 민중극단에서 이음전을 전속배우로 활용했고, 극단 취성좌를 이끌던 김소랑도 이음전을 자주 무대에 출연시켰습니다. 당시에는 번역극이나 번안극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일본의 신파극 '시들은 방초'와 톨스토이 원작의 '부활'이 무대에 올려졌는데 작품에서 이음전은 처녀 역할이나 카추샤 등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면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애리수란 예명은 '부활'의 주인공 카추샤로 출연했을 때 김소랑으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쁜 배우생활을 하는 틈틈이 이애리수는 정기적으로 통신강의록을 구독하며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쳤고, 보통학교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배우 이애리수가 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은 17세 때의 일입니다. 연극 '유랑의 남녀'를 공연하던 중 막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평소 노래 부르기를 즐기던 이애리수를 무대 위로 오르게 한 것입니다. 반응은 뜻밖으로 대단히 좋았고, 이로부터 배우 겸 본격적 막간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애리수가 레코드사에서 녹음하여 정식으로 음반을 발표한 것은 '레붸가'(콜럼비아)란 노래입니다. 그 후로도 빅터레코드사에서 '카페의 노래''메리의 노래''라인강''부활' 등의 번안가요나 외국곡 등의 창가풍 작품들을 노래하여 SP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이애리수는 여러 단원들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과 전수린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를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의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비감한 심정에 젖은 두 사람은 눈물에 젖어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영남대 국문과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