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52] 우문상 시인의 경남 거창

학교 운동장이 된 집터…어머니와 누웠던 대청마루는 어디쯤일까

무더운 여름날 소꿉친구들과 즐겨 찾았던 거창 건계정 계곡.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유년시절을 회상해 본다. 승수대, 대야산성 그리고 함벽루 밑을 맴도는 푸른 물과 수려한 계곡들... 수려한 거창 자연은 나의 문학적 고향으로 다가온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무더운 여름날 소꿉친구들과 즐겨 찾았던 거창 건계정 계곡.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유년시절을 회상해 본다. 승수대, 대야산성 그리고 함벽루 밑을 맴도는 푸른 물과 수려한 계곡들... 수려한 거창 자연은 나의 문학적 고향으로 다가온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오랜만에 찾은 초등학교에서 운동장으로 변한 집터를 가늠해본다. 거창성당 부설 유치원에 다니던 기억도 새롭다.
오랜만에 찾은 초등학교에서 운동장으로 변한 집터를 가늠해본다. 거창성당 부설 유치원에 다니던 기억도 새롭다.
내고향 거창 시가지. 학교 졸업후 대구에서 터를 잡고 생활하지만 부모님 산소가 있는 이곳은 언제나 달려가고픈 마음의 고향이다.
내고향 거창 시가지. 학교 졸업후 대구에서 터를 잡고 생활하지만 부모님 산소가 있는 이곳은 언제나 달려가고픈 마음의 고향이다.
우문상 시인
우문상 시인

짹짹 지지배배 표롱 가지를 옮겨 다니는 새소리와 함께 왁자지껄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도 늦잠의 여유를 부리던 일요일 아침! 내 어린 날 대부분의 추억은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가구 공장 옆문을 열면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학교 후문이 있다. 운동장은 내 마당이었고 놀이터였다. 여름밤 동네 어른들이 삼삼오오 돗자리를 깔고 정담을 나누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아이들은 잠자리, 반딧불이를 쫓아 온 운동장을 뛰어다녔고 피곤해지면 어머니 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다 잠이 들곤 했다. 어쩌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본 날은 동화 같은 꿈을 꾸기도 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비칠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여름밤들, 그 별들….

내가 살던 집은 청 마루가 넓은 전형적인 한옥이었다. 마당에는 아주 깊고 큰 우물이 있었다. 늘 물 사정이 부족한 학교 아이들이 우르르 담을 넘어 집으로 몰려왔다. 어머니는 가끔씩 두레박을 감추셨는데 아이들에게 우물을 깨끗하게 쓰겠다는 다짐을 받고서 다시 두레박을 내주시곤 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저녁 무렵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호박돌에 갓 담은 김치를 한 보새기 놓고 가곤 했다.

하지만 그 깊은 우물도 어린 나에게 너무나 넓었던 청 마루도 오래전에 학교 운동장이 되어 버렸다. 들은 이야기로는 빚 때문에 헐값에 넘어갔던 그 집은 집의 목재가 아주 좋아 그것들을 뜯어서 다른 곳에 새집을 크게 짓고도 남았다고 한다. 부모님의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내가 살던 집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지금도 내내 아쉽다.

나는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어려운 교포 사회에서 그런대로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장남인 아버지는 할아버지 성화에 내가 네 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사시던 거창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 형제는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동네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곤 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잘 입지 않던 멜빵 바지를 입고 밖에 나가면 아이들은 우르르 우리 형제 쪽으로 몰려들곤 했는데 한동안은 그게 무서워 집안에서만 맴돌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듬해 형과 함께 성당에 처음 생긴 유치원에 보내 우리말을 배우게 하셨다.

할아버지는 거창에 있는 가구점을 아버지께 맡기고 합천에 가구 공장을 운영하시면서 왔다갔다 하셨다. 할아버지는 아주 엄하셔서 나는 대문 쪽에서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만 나면 작은 방으로 숨어들고는 했다. 늘 풀 먹인 빳빳한 모시옷과 두루마기를 입으셨는데 할아버지의 입성을 준비하느라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의 경계 대상이었다. 목재 살 돈을 친구에게 빌려주고 못 받거나 화투판에서 날리기를 연중행사처럼 하시던 아버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곤 했다.

고우셨지만 엄하셨던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 일본에서 시작한 한복집은 평판이 나 일감이 밀릴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포들이 엄두도 못 내는 TV도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그 단란한 시절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가끔 일본에서 가져온 빛바랜 앨범 몇 권을 보물상자처럼 챙기시던 어머니, 우리에게 그 시절을 도란도란 설명해 주실 때에 행복해 보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칠순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그리워하던 고향 같은 타향, 지금처럼 쉽게 갈 수 있는 시절이었으면 여기저기 모시고 옛 추억을 찾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돌아가시기 전 일본에 살고 있는 이모님 초청으로 다녀오신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4학년 2학기 때 할머니와 이듬해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구 공장이 있는 합천으로 이사를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두툼한 추억의 노트로 남아 있다. 대야산성, 함벽루 밑을 맴도는 푸른 물속을 여름이면 친구들이랑 뛰어내렸던 기억들, 넓은 강줄기와 끝도 없이 펼쳐진 은빛 백사장, 모래톱, 해 질 녘 키 큰 포플러 나무의 긴 그림자, 그곳에 머물던 풍경들이 가을빛처럼 그립다. 아마 나의 문학적 고향은 그곳이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시 거창으로 왔다. 그 사이 가세가 기울어 빈손으로 돌아온 고향. 중고등 시절이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가지런하던 성당 옆에 작은 방 두 칸을 겨우 월세 얻었지만 당장 끼니가 어려울 정도로 살림이 막막하자 어머니는 일본에서 하시던 한복 삯바느질을 시작하셨다. 가끔 밤을 꼬박 새우시기도 하셨다.

다섯 명의 아이가 내미는 각종 잡부금 요구에 한두 명은 꼭 울면서 등교하는 날들이었다. 우리들 보내놓고 아침마다 가슴이 메일 때가 참 많았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다. 드륵드륵 미싱 밟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후에 어머니를 생각하며 '낮달'이란 시를 썼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허공에 떠있는 낮달처럼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것 같아서였다.

낮달

'회색빛 하늘에 국물 한 방울 흘러 있다/ 찬 사발에 정화수 떠놓고/ 밤새 손 비비던 어머니 눈물처럼/ 새가 쪼아 먹다 남긴 까치밥처럼/ 마르다 만 얼룩을 몰고 새들은/ 그리운 기억 속으로 날아간다. 차곡차곡 접어둔 이름들/ 먼지 자욱이 남기고/ 산모롱이 돌아가버린 지 오래/ 마을 정류장에 서 있던 그림자가/ 하늘 못에 잠겼다 떠오른다. 굽은 등 아직도 펴지 못한 채/ 비비던 손 놓지 못한 채/ 새들이 엉거주춤 떠 있는 낮달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운 어머니 얼룩은/ 오래 입어 낡아버린 내 셔츠에/ 외로운 섬처럼 떠 있다.' (낮달/ 졸시)

중학교 시절은 참 암울했다. 사춘기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속을 많이 썩였다. 중학을 졸업하고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을 형편이었지만 그게 별로 안타깝지가 않았다. 차라리 서울 같은 대도시로 가서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친한 친구가 교장으로 계신 거창농림고에 공납금 면제(중3 때 우수반이라는 명목) 혜택을 받고 진학을 했다. 오래된 역사가 한눈에 담겨 있는, 어지간한 대학만큼 넓은 학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였고 잘 정돈된 조경과 수많은 나무가 울창하여 마치 식물원 같았다. 야외 교실의 우람한 소나무 밑에서의 은은한 솔 내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추억들은 가끔씩 첫사랑 소녀를 생각하듯 설렘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도립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지만 옛 모습은 곳곳에 남아 있다.

거창에는 어디를 가도 물이 철철 넘치는 계곡과 오래된 정자들이 많다. 또 서원이 많은 이곳은 예로부터 교육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서부 경남의 교육 중추지로 자리 잡았다. 40년 전에 벌써 읍 단위에 고등학교가 6개나 있었고 이곳을 거쳐 간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은 초등학교에서 운동장으로 변한 집터를 가늠해보며 거닐다가 발길은 텅 빈 교실을 힐끔거린다. 귓전에 낡은 풍금 소리가 들려오는 듯 동무들과 목청껏 불렀던 '울긋불긋 꽃동네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병아리 같은 입 모양을 그려 본다. 때 이른 코스모스가 배웅하는 텅 빈 교정을 빠져나오다 뒤돌아보니 아직도 저만치 걸쳐 있는 낮달과 눈이 마주친다.

우문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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