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한국 근대미술사의 지각변동 조짐

2012년 7월 6일 저녁, 대구문화재단 주최로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 '이인성과 同時代(동시대)의 작가들'이란 주제의 미술포럼이 열렸다.

무더웠던 한여름 밤의 열기 속에 행사가 개최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많은 참관인들이 2시간 30분이란 긴 발표 시간에도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모두가 긴장감 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본인은 지난 3월 23일 이미 과천 현대미술관이 주최했던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기에 큰 기대감 없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번 대구 포럼에서 의외의 자료들이 발표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 근대미술사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한국 근대미술에 관한 미술사학회의 대체적인 생각들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시대 36년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발전(근대화 과정)이 일제에 의해 저지당해 왔기에 근대미술의 내용들도 보잘것없거나 오히려 수치스러운 수준이므로 차라리 덮어 두자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통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패배주의적인 사고로 인해 우리 미술계의 초창기(1920~1940년대) 수많은 선배 작가들의 작품 대부분이 빛도 못 본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렸다. 우리 고장 출신 천재화가인 이인성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푸대접을 받아온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인성에 대한 평가가 이번 미술포럼의 몇몇 발표자들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었다. 본인은 이러한 주장들은 지금까지 근대미술사학회가 지난 세월 오랫동안 주장해왔던 기반을 무너뜨리는, 대지각변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표 당일 제기되었던 논의들을 간단히 발췌'요약한다면 ▷1930년대 대구에서 발족한 '향토회'란 초기 미술단체의 창립회원들인 서동진, 김용준, 최화수, 박명조, 김호룡 등과 이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상정, 이상화 형제와 이여성 (이쾌대 형) 등은 모두 민족주의자 집안과 투철한 항일 정신의 독립운동가 집안사람들이었다. ▷당시 이들 향토회 회원전을 취재했던 언론들은 '미술이 정치적 사상이나 종교성을 배제한 순수한 입장에서 진정한 향토적 예술 찾기에 진력하겠다는 의도'였다고 말하고 있다.(동아일보 1930.4.) ▷이처럼 당당히 자신들의 이념과 포부를 밝히고 나선 향토회의 창립 의지가 어떻게 일제가 강요한 지방색(Localism)과 일치한다고 보겠는가 등이었다.

초창기 향토회전 참가 이후 이인성은 조선미전(선전)에서 두어 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쳐 곧장 지방 유지들의 도움으로 20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불과 3년간의 짧은 유학기간이었다. 하지만 낮에는 물감 제조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밤엔 미술학교에 나가 그림공부를 하면서도 그는 어느 특정 일본작가의 화풍에 매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양미술의 원류였던 세잔, 반 고흐, 보나르, 고갱 등의 작품세계와 작가정신을 스스로 자기화(육화'肉化)시켜 가면서 그의 예술세계의 깊이와 폭을 넓혀 나갔다.

그는 또한 자기 스스로를 독려,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기의 예술을 키워나갔다. 일본 도착 이듬해인 1932년(20세)부터 그렇게 어렵다는 일본제전에 4차례 연속 입선하며, 천재화가란 소리에 걸맞은 성과를 획득하였고, 귀국 후인 1935년(23세)에 드디어 조선미전에서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50년,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본인도 20여 년 전, '한국 근대회화의 근대성에 관한 연구'란 주제로 대학원 졸업논문을 발표하였고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미술계에서 활동해왔다. 나 개인의 주관적인 시각과 평가이지만 작가 이인성, 그는 참으로 대단한 작가이며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근대미술계에선 '태양'과 같은 불멸의 존재이다.

앞으로 더 훌륭한 논문들이 나와 우리 근대미술 화단이 더욱 풍성해지길 기대해본다.

김태수/미술사학·맥향화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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