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우리는 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는가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다"는 영국 정치가 파머스톤의 말만큼 국제사회의 작동 방식을 명쾌하게 짚은 명언도 없다. 게르만 민족의 생활공간(Lebensraum) 확보를 위해 러시아를 노예로 삼겠다는 히틀러와 자본주의를 박멸하겠다는 스탈린이 불가침조약으로 '적과의 동침'에 들어간 것이나 미국과의 전쟁 동안 중국으로부터 200만 달러의 물자와 후방 지원, 대공 방어 임무를 맡은 총 35만 명의 병력을 지원받았던 베트남이 '배은망덕'하게도 중국에 맞서 미국과 왈츠를 추고 있는 사례는 이를 잘 증명한다.

이처럼 국가이익은 원수와도 손을 잡게 한다. 국제관계에서 명분과 국가이익이 갈등할 때 대체로 승리하는 쪽은 국가이익이었음을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식민 지배의 치욕을 안겨준 일본과 1965년 수교한 것은 바로 국가이익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런 국제사회의 냉정한 작동 방식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무산되는 과정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우리 국익의 관점에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와 연관해 이 협정의 필요성 여부를 따지는 전략적 사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비밀리에 국무회의를 통과시킨 절차적 부당성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일본과 손을 잡나?'는 격앙된 국민정서만이 판을 쳤다.

물론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대 사안을 비공개로 처리한 방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번 협정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이 없기 때문에 국회 동의가 필요없다"는 외교부의 인식도 국민의 수준과 멀어도 한참 멀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소동 뒤에 당장은 아니라도 훗날 일본과 협력 여부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를 놓고 그 누구도 차분히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있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책임질 대선 주자라는 사람들조차도 꿀 먹은 벙어리다.

중국의 굴기(崛起)에 맞서 미국을 연결고리로 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중(反中) 연합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다. 중국의 자세 변화가 없는 한 이러한 힘의 충돌은 앞으로 더 격심한 양상을 띨 것이다. 우리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런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중국이냐 미국이냐는 괴로운 양자택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을 선택하면 중국이 추구하는 신(新)중화질서로의 편입을 피할 수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21세기판 조공 관계의 형성을 뜻한다.

미국을 택하면 중국에 굴종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겠지만 그 대가로 중국의 군사'외교적 압박과 위협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엄청난 경제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물론 제3의 길도 있다. 중국과 미'일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미국과 중국의 아시아 패권 경쟁의 양상에 비춰 이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국도 중국도 그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이런 복잡한 그림 속에 넣고 검토해봐야 할 사안이다. 협정을 꼭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협정의 타당성이나 실익 여부를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좀 더 장기적인 전망하에 따져보자는 것이다. 분기탱천하는 것은 당장 카타르시스를 줄지 몰라도 국제 정세는 국민 정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혹자는 '협정'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도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동북아 정세를 잘못 읽어도 한참 잘못 읽고 있는 헛소리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 현실적인 위험으로 다가올 경우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일본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중국의 패권주의가 부추기는 것이지 제한된 정보 교류 정도에 그치는 '협정'이 돕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저해한다는 주장도 허점투성이다. 지금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저해하는 주범은 북한이다. 그리고 중국은 북한의 든든한 '형님'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는 '팍스 차이나'라는 것밖에 안 된다. 이는 중국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자는 것인데 과연 우리 국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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