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아주인 자족재 신봉석과 의성 용연리 회화나무

나라와 집안의 복을 빌며 심은 나무

상사로 모셨던 신종웅 님이 한 권의 책을 보내왔다. 문인협회 회원으로 있어 자주 책을 받는 필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선물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선조가 남긴 유고(遺稿)를 부친께서 출판하려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를 이어 완성한 것도 존경스럽지만,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아니하고 자연을 벗 삼아 은거했지만 진실로 나랏일을 걱정하고, 행의가 올바른 선비가 남긴 문집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책에 실린 재실(齋室) 옆의 큰 향나무가 인상적이었다. 고맙다는 전화를 하면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제 시간을 내 가자고 했다.

본관이 아주인 자족재(自足齋) 신봉석(申鳳錫)은 1631년(인조 9)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조선시대 정2품 무관)를 지낸 아버지 신견(申堅)과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구미 금오산으로 은거한 야은 길재와 달리 의성 단밀현 만경산으로 낙향한 국천효자(國薦孝子)로, 전라도안렴사를 지낸 퇴재 신우(申祐)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글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사기'(史記) 중에서 명군과 충신의 사적(事跡)을 좋아해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13세 때에 아버지 명으로 어량(물고기를 잡는 도구)을 보러 가서는 잉어 한 마리만 달랑 건져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차마 어린 고기까지 다 잡아올 수가 없었다고 하여 미물(微物)에도 깊은 애정을 가진 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효성 또한 지극해 가슴앓이를 하는 아버지를 위해 기왓장을 따뜻하게 데워 가슴에 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대변을 직접 맛보며 병세를 살폈다고 한다. 아내에게는 어진 남편으로, 동기간에는 우애로, 자식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효종(孝宗)이 불시에 방문하여 친 시험에서 장원을 했으나, 공의 다른 작품에 문제가 있다며 대간(臺諫)이 간하여 취소되고 대신 상으로 종이 10속, 붓 40자루, 먹 30정을 하사받고 낙향하여 자족재를 짓고 스스로 호로 삼아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높은 식견과 고매한 인품이 알려지면서 홍성귀 등 고을의 수령들이 수시로 찾아와 정사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공은 현실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1677년(숙종 3) 국정의 다섯 가지 폐단의 시정을 요구하는 오폐소(五弊疎)를 올렸다.

즉 조세와 부역의 폐단, 군역(軍役)의 폐단, 부익부빈익빈, 영남인의 차별, 공명정대한 인재 등용(登用)을 실시할 것을 청하고 또한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704년(숙종 30) 돌아가시니 향년 74세로 '자족재집'을 남겼다.

안동인 홍승목(洪承穆)은 '자족재집'의 서문에서 '공은 영남의 추로지향에서 태어나 절의한 자태로서 실학에 뜻을 두어 서책의 문에 탐닉하였고 덕행의 아름다운 일에 돈독히 하여 자애롭고 자상하고 효성스럽고 공손하였다. 부모형제의 말에 어김이 없었으며 스승의 학풍이라 하여 그대로 답습하지 아니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공은 자족(自足)의 도를 '고상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것도 아니며 다만 마음에 있을 뿐이다'고 하며 한적한 시골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에 만족했다.

오월의 마지막 신(申) 국장께서 차를 몰고 왔다. 의성읍 용연리 일명 새못안은 불과 1시간 정도 거리였다. 마을 뒤쪽에 자리 잡은 자족재가 보였다. 오른쪽은 향나무가, 왼쪽은 큰 회화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향나무보다 회화나무가 더 아름다웠다. 자족재가 직접 심었다는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분명해 보였다.

동산의 들길 동쪽 저 두 그루 회화나무는/ 같은 때에 심어 크기가 서로 같구나./ 음음한 푸른 잎은 다시 덮개를 이루고/ 점점이 노란 꽃은 흡족히 바람 받네./ 밝은 달은 조롱 끝에서 빛을 숨기고/ 날아다니는 꾀꼬리 소리 나무 넘어 영롱하네./ 주인은 감히 왕공(王公)의 뜻에 비기어/ 덕을 심으면 집안에 복이 형통하리라.

'문 앞의 두 그루 회화나무'라는 시(詩)다. 공은 나무를 심으며 중국 송나라 사람 왕호가 자기 마당에 회화나무 3그루를 심고 '내 자손은 반드시 삼공(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둘째 아들이 재상에 올랐다는 고사(故事)까지 인용했다.

연못도 있었다고 하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다만 공이 심은 향나무와 회화나무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어 세월은 가도 나무는 남아 옛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