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종북 논란으로 시끄럽다.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보수진영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연일 비난을 퍼붓고 있고 진보진영은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이다. 이런 해묵은 색깔 논쟁이 누구의 책임인지 어떤 이유인지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자신에게 가혹하리만큼 철저해야만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다 그르다는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높고 단단한 불신의 벽만을 쌓을 뿐이다.
지난 일요일 오후, 집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음반 한 장을 찾았다.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였다. 1993년에 발표된 이 음반은 사실 당시엔 불법음반이었다. 1975년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모든 대중가요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는 의무적으로 소위 건전가요라는 것을 수록해야만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정권은 소위 사전심의제라는 덫을 만들어 대중문화를 통제했고 그 검열의 증거로 건전가요가 수록된 음반만이 시장에 유통될 수 있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제기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태춘은 1993년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사전 심의제 철폐를 위한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했다. 이미 그는 1990년 '아! 대한민국'이라는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음반을 발표했지만 이 음반은 선언적 의미가 더 강했다. 이 음반에 담긴 몇 곡의 노래들은 대중성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서사적(선동적?)인 가사들로 따라오라고 따라와야만 한다고 노래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음반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러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대중성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함께 가자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음반이 군사독재문화의 청산을 위한 대중음악의 진정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1996년 6월. 헌법재판소는 결국 사전심의제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제야 사람들 사이에서 낮게 불리던 많은 노래들이 '금지곡'이라는 유령의 그늘을 벗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다.
'시인의 마을' '촛불' '사랑하는 이에게'와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곡들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이 음반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최근 정태춘과 박은옥은 오랜 침묵 끝에 새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내고 다시 무대에 섰다. 늦은 밤, 불을 끄고 그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1993년 절필을 선언하고 3년간 문단을 떠났던 소설가 박범신을 떠올렸다. 3년간의 칩거가 낳은 그의 글들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새 앨범이 그랬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이후 무려 10년 만에 발표한 앨범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쓸쓸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한때 우리가 가졌던 분노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노래한다. 그래서 새 앨범의 마지막 노래가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것이 더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어쩌면 세상에 대한 희망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이미 사라졌거나 낡아 부스러져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서 그들은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고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고 노래한다. 우리가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것들은 잊혀져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가고 그 흐르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라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고 노래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라고 사람들의 희망을 말한다. 절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 절망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때, 극복할 수 있다. 결핍과 빈곤으로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희망과 따뜻한 연민의 노래가 아름답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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