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53>소설가 심형준의 김천

직지사 품고 있는 황악산 보인다… 어머니 같은 풍경

고향은 생각하면 왈칵 울음 쏟아지는 어머니 같은 그리움의 땅이다. 고향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연인 같은 설렘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고향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생각나는 기억의 공간이다. 고향은 언제나 아름답게 회억(回憶)되는 추억의 요람이다. 고향은 이처럼 과거 속의 수채화 같은 한 폭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 같은 고향에 대한 감상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굳이 오랜 세월 고향 아닌 타향살이를 해서만은 아니다. 나처럼 평생을 거의 고향땅에서 고향의 산하와 함께해오는 사람도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과 설렘은 똑같다. 고향은 이런 곳이다.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 604번지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원고향이다. 하지만 내게 고향이란 개념은 남다른데가 있다. 강원도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다 휴가를 올 적에 추풍령이 가까워지면 고향집에 다 왔다는 그 반가움, 그 편안함, 그 행복함이 추풍령을 내 고향 시작점이게 했다. 이렇게 추풍령에서 시작되는 김천 일원이 모두 그토록 사랑하는 내 고향땅이다.

1967년 이래 '향토사' 편찬에 세 차례나 참여하여 누구보다 이 고장에 대해 많이 알고, 내 작품 속 지명(地名)은 무리하지 않은 한 이 고장에 있는 지명을 그대로 쓸 만큼 내 고향 김천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대문에 고향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의 '수향재'(守鄕齋)란 현판을 걸어 놓고, '황악산방'이란 당호도 같이 쓰고 있다. 이런데도 굳이 그 반경(半徑)을 줄이라면, 1600년 신라시대의 명찰(名刹) 직지사를 품고 있는 해발 1,111m의 황악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꼭 어디랄 곳 없이 전부가 더없이 소중한 나의 고향이다.

물론 이 영역에는 39년 전에 아내를 만나 3남매를 얻고, 문단에 데뷔한 대항면 향천리 637번지가 포함되어 있다. 뒷산 기슭에 300여 년 동안 시인 두 사람, 소설가 한 사람 등 문인이 세 사람이나 나오기까지를 묵묵히 지켜봐 준 명목(名木) 직지문인송이 있어 더 애정이 간다. 나의 교실이자 창작실인 김천 파크호텔 뒤로 해서 세계도자기박물관까지의 산 길도 내 작가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산책 코스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어 방황과 갈등, 번민으로 고통스러워했던 시절의 약수터, 일주문, 금강문, 솔숲, 사천왕문, 대웅전, 단풍길, 관음전, 사명각, 명부전, 비로전, 비로전 뒤 대밭에 그렇게도 많던 학과 두루미, 계곡 등으로 뚜렷이 그려지는 직지사는 나를 이끌어주고, 나를 키워준 모태(母胎)같은 곳이다. 그리고 학창시절 한때 통학을 하면서 푸른 이상(理想)과 작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웠던 직지사역은, 지금도 외롭거나 작품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자주 찾는 '내 마음의 고향, 내 문학의 성지(聖地)'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역원들이 모두 철수한 폐쇄 역이 되고 말았다.

봄가을에는 피라미'붕어'송사리들을 잡아 천렵을 하고, 여름에는 암벽 위에서 다이빙을 하며 멱을 감고, 겨울이면 얼음을 지치던 직지천과 태화천이 합치는 '보아구지'는 이제 형태도 찾아볼 수 없이 되었다. 그 위로 KTX 철로가 지나간 때문이다. 또 봄이면 종달새를 잡던 말무덤 들의 그 푸른 보리밭 물결도 잊을 수가 없다. 겨울날 해질녘이면 복전리를 중심으로 하늘 가득 무리를 지어 선회를 하던 그 많던 갈까마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린 시절 물총새를 잡던 갈밭골, 시도 때도 없이 그네를 타던 봉산우체국 앞 정자나무 등등,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그 옛날의 고향은, 세월이 가도 이처럼 빛바랠 줄을 모른다.

덕천리를 생각하면 가난과 개발이란 상반된 두 성질의 기억이 동시에 기다린 듯 선뜻 다가온다.

들판과 직지천변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전쟁의 잔해들은 어린 우리들의 위험한 장난감이었다. 마을 앞 신작로를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미군 차량들을 향해 '할로'를 외치고, 그들이 던져주는 C-레이션 부스러기들을 얻어먹던 일들도 내가 안고 가는 어두운 기억들이다.

보다 잘 살아보겠다고 직지천 냇바닥에서 돌덩이를 모으고, 자갈을 쳐서 팔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오랫동안 신작로(4번국도)를 잇는 다리 아래서 삼을 찌고, 껍질을 벗기던 어머니는 벌써 오래 전에 이 땅을 떠나버리셨다. 그래도 언제나 그립고 보고 싶을 적에는 그 시간대의 모습 그대로 떠올릴 수 있어 기억이란 능력에 감사한다. 계절 따라 명주와 베를 짜고,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치던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그리움으로 와 닿는다. 짚가리가 지붕보다 높이 쌓이고, 초가지붕을 깔끔하게 새 단장하던 늦가을의 풍경은 다가오는 겨울채비였다. 무너진 돌담 너머로 된장 그릇, 떡 그릇을 주고받던 인심이 갈수록 너무 그립다. 곧장 부셔져 버릴 것 같은 사립문을 밀고 도둑이 들지 않았던 그때는 지금처럼 각박하지도 살벌하지도 않았다.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지면 하늘이 주는 선물인 양 마당에 떨어진 붕어와 미꾸라지 잡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소나기가 멎고 나면 어김없이 일곱 빛깔 무지개가 곱게 떠올랐다. 지금은 좀처럼 무지개를 볼 수 없어 얼마나 아쉬운지 모른다. 당시로선 수박서리, 닭서리, 콩사리, 밀사리 등은 그렇게 나쁜 짓거리라 보지 않았다. 생선이나 김, 고기 같은 것들은 명절날, 제삿날, 어른들 생신날, 귀한 손님이 오신 때가 아니면 구경을 할 수 없는 특식이었다. 때문에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친구들끼리 저마다 얼마씩의 쌀을 거두어 한 끼 밥을 같이 해먹은 모둠밥은 모처럼 호식(好食)을 했던 즐거운 전통놀이였다.

당시만 해도 물이 없어 밭농사밖에 지을 수 없었다. 그러다 자유당 때 들어선 기날저수지는 꿈인 듯 우리에게 쌀밥을 먹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조'보리'밀을 주곡(主穀)으로 했다. 겨울날 저녁 한 끼는 거의 조를 섞은 시래기죽을 끓여 먹었다. 솥뚜껑을 열면 영락없는 쇠죽 냄새가 확 풍겼다. 양념마저 갖출 수가 없어 소금을 한 주먹 넣고 끓인 탓이었다. 그즈음 산다는 것의 모든 의미는 배 채우는 일로 이어졌고, 먹을거리가 생겨도 맛은 뒷전이었다. 어떡하든 물을 더 부어 양을 늘려야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은 그만큼 절실한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 고향은 이처럼 좋았던 기억이든, 어두웠던 기억이든 지나간 세월 속에 기다랗게 누워있는 짙은 그림자 같은 것인가 보다.

아무튼 1960년대 후반 마을 앞 신작로를 포장하느라 공병대대가 마을 뒤 직지천변에 2년 넘게 주둔을 했었던 일은 근대화로 가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고향땅에 불어온 개발의 바람, 근대화의 바람은 차츰 오래된 고향의 흔적 지우기에 다름 아니었다. 편리와 편의를 위해 개발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사라져간 추억의 흔적들이 아쉽고, 안타까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매달려 놀던 나뭇가지 하나, 발부리에 걸리던 돌멩이 하나가 예대로 없어도 내 고향을 사랑한다. 그리고 지금도 틈틈이 온통 비닐하우스 뿐인 들판 사이를 헤치고 추억 더듬기에 나선다. 그것들은 다시 없는 내 글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 세상과 인연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 고향 김천의 모든 기억을 품안에 소중히 꼬옥 껴안고 가고 싶다.

심 형 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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