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라디오는 공통점이 있다. 읽거나 들을 때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
신문 독자들은 기사를 읽으며 등장인물과 장소, 현장 분위기 등을 머릿속에 그린다. 칼럼을 읽을 때는 행간(行間'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 글쓴이와 고차원적인 교감도 한다.
라디오 청취자들도 마찬가지. 진행자인 '디제이'(DJ)가 다른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줄 때, 디제이의 목소리 어조와 호흡을 나침반 삼아 사연 속 등장인물의 감정을 읽는다. 청취자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주제삼아 머릿속에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도 한다.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뮤직비디오와 달리 각양각색 저마다의 버전(version)이 있다.
기자는 또 다른 '상상력 발전소'인 라디오 세상이 궁금해졌다. 다행히 '아마추어'인 기자도 동참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다. 우리 지역 소출력 라디오 방송인 '성서공동체 FM'의 도움으로 라디오 디제이가 돼 봤다.
◆아이템 기획, 대본 짜기…
대구 달서구 신당동 '성서공동체 FM' 스튜디오에서 달빛소년(31)을 만났다. "영화 '반칙왕'에서 평범한 직장인인 주인공이 퇴근 후 '타이거 마스크'라는 별칭의 레슬링 선수가 돼 일탈을 하듯 저도 본명 대신 별칭을 씁니다." 그는 성서공동체 FM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1년여 경력의 직장인 디제이이다. 그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기자는 대뜸 대본을 요구했다. 제작진이 만들어 준 대본을 그저 맛깔스럽게 읽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황기자. 라디오 디제이는 대본 읽는 로봇이 아닙니다. 스스로 아이템을 기획하고, 대본도 짜야 합니다. 기획력과 상상력을 발휘해야 해요."
그랬다. 기사 취재도 아이템 기획이 가장 먼저이고, 또 가장 중요하듯이 라디오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곧장 달빛소년과 아이템 회의에 들어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성서공동체 FM의 간판 음악 프로그램이다. 그러면서 시사 이슈와 청취자 사연도 소개한다. 그에 맞는 기획이 필요했다.
"황기자. 지상파 라디오에서는 할 수 없는 기발한 기획 어떨까요?". 기자는 적극 동의했다. 표현이나 분량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한 것이 소출력 라디오 방송의 강점이다.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지상파 라디오에서는 분량이 긴 곡을 틀기 어렵다는 점. 하지만 성서공동체 FM에서는 가능하다. 그래서 기자가 고른 곡이 '강병철과 삼태기'의 '삼태기 메들리'였다. 1984년에 발표된 이 곡은 97곡의 가요'팝'동요'민요 등을 섞어 25분이 넘는 분량을 자랑한다. "신나는 메들리 곡이라 토요일 오후에 라디오를 듣는 중장년층 이상 시민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여기에 메들리에 쓰인 곡들을 분석해 소개하는 시간도 가집시다." 기획에서 주요 청취자도 고려했고, '노래 분석'이라는 콘텐츠도 집어넣었다. 기획안은 무사히 통과. 평소 옛날 가요에 관심이 많던 기자는 신나게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달빛소년은 최신 시사 이슈를 재미나게 분석해 들려주는 코너를 준비했다. 방송뉴스 등에 나오는 유명 인사들의 멘트를 스크랩해 짜깁기한다. 각계각층의 입장을 모아 일목요연하게 구성하면서 달빛소년의 의견도 덧붙인다. 디제이는 자기 이름을 내건 방송을 통해 짜릿한 사회적 발설도 할 수 있는 셈이다.
라디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청취자 사연도 정리했다. 그리고 코너와 코너 사이를 메울 재치만점 코멘트들도 준비 완료. 이제 실제 방송만 남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큐!"
"듣기만 하던 라디오, 이제 우리가 말한다."
코멘트와 함께 토요일 오후 1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방송을 하게 된 황기자라고 합니다. 이름은 묻지 마세요. 그냥 황기자랍니다." 기자는 준비한 대본을 리듬감 있게 읽어 나갔다. 어느 정도 방송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대본에 없는 얘기를 술술 풀어내기도 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실수도 적잖았다. 이따금 말을 '버벅'거렸다. 심지어 마이크에 '쿵'하고 머리를 박기도 했다. 방송 사고의 위기. 다행히 달빛소년이 "황기자가 마이크로 효과음도 낼 줄 아는군요"하며 재치 있게 받아 넘겨줬다. 기자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달빛소년도 손으로 'OK' 표시를 했다. 이처럼 방송 중 서로 주고받는 몸짓, 손짓은 원활한 진행을 돕는 제2의 언어이다.
방송 마지막에는 독자 사연을 소개했다. 인근 한 요양병원에서 어르신이 보낸 사연이었다. 내용은 특별할 것 없었다. 방송 잘 듣고 있다는 사연. 하지만 청취자 규모가 적은 소출력 라디오 방송 관계자들에게는 청취자들이 보내는 사연 하나하나가 특별한 감동이다. 달빛소년은 "청취자 한 명만 있어도 방송을 하겠다는 다른 라디오 관계자들의 말이 실감된다"고 말했다.
어느덧 스튜디오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켰고, 2시간 방송도 끝이 났다. "황기자. 떨렸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기자는 방송 초반에는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시간도 거북이걸음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것이 방송 중반부터는 진행에 자신감이 붙으며 실수도 줄었다. 시간도 마치 놀이공원 청룡열차를 타듯 쾌활하게 지나갔다. '라디오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라디오를 만드는 사람들
달빛소년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2개월간 성서공동체 FM 스튜디오를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다른 프로그램 디제이들이 궁금해졌다.
편성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프로그램은 '박선미의 솔직한 배낭'이었다. 진행자는 박선미(33'여) 씨. 그는 여행과 인문학을 결합한 독특한 주제로 지난해 1월부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죠. 여행이 곧 살아 숨 쉬는 인문학입니다." 박 씨는 20대 중반 때 베트남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그저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평화'와 '생명'을 화두로 현지 사람들의 일상과 교감했다. 그러면서 쌓은 여행의 경험치를 편안한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어 선택한 통로가 바로 라디오란다. 올해 4월 대구 중구에 문을 연 '인문학 놀이터'를 운영하고 있는 박 씨는 "라디오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여행 인문학'을 교감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성은(27'여) 씨는 '산소 같은 인권 톡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신조는 '무거운 인권 이야기는 가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인권기자단이 출연해 쉽고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를 풀어낸다. 라디오 PD의 꿈을 꾸고 있다는 그는 "자원봉사의 보람도 얻고, 꿈을 이루기 위한 연습도 하고 있어 뿌듯하다"며 "내 목소리가 청취자의 귓속 풍경이 되는 것이 바로 디제이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성서공동체 FM은 우리 지역에 사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송출하고 있다.
'꾸러기들의 신나는 방송'은 대구 달서구 경화유치원 원생들이 주인공이 돼 지난해 4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은 방송을 진행하는 재미는 물론 녹음된 방송에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며 신기해하는 재미도 느낀단다. 프로그램의 자랑은 '마주보기' 코너다.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쏟아내는 수다를 가감 없이 방송에 내보낸다.
대구 달서구의 어르신들이 진행하는 '실버 스튜디오'도 있다. 어르신들은 스튜디오 장비도 직접 조작하는 등 열성이 대단하다. 손자'손녀에게 휴대전화 사용법을 배우며 겪은 에피소드로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리고, 각자 쓴 시를 낭송하며 스튜디오를 풍류의 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또 인도네시아'네팔'파키스탄'몽골'방글라데시'중국 등 인근 성서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디제이가 돼 고국 노래를 틀어주는 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box)개국 7주년 성서 FM 정수경 이사장 "지역 밀착 라디오로 거듭날 것"
올해로 개국한 지 7년째를 맞는 성서공동체 FM의 정수경 이사장은 "마이크가 절실한 사람에게, 또 지역 주민에게 좀 더 다가가는 '열린 라디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것이 지난 7년간 프로그램 편성의 기본 원칙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발언권이 절실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청취자에게 전해지는 울림도 다르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 지역 주민의 얘기나 각종 행사 등을 더 많이 라디오에 녹여내겠다"고 말했다.
"지역 한 아파트단지를 찾은 적이 있어요. 일부러 외로운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마이크를 내밀었습니다. 놀랐어요. 꼬깃꼬깃 접어 둔 얘기들을 한가득 꺼내 놓으셨고, 살아온 생의 고단함을 지혜의 말들로 풀어내셨어요. 그게 연륜의 힘이고, 우리 사회가 발굴해 경청해야할 숨은 가치에요. 지역에서 지역 공동체 라디오가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황희진기자
※키워드.
소출력 라디오 방송=FM 주파수 대역(88∼108MHz)에서 소출력(1W 이하)으로 반경 5㎞ 내외의 방송 권역을 서비스하는 지역 밀착형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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