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사랑, 허투루 하지 말라

박금자 할머니는 음치였다. MP3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노래를 이어폰을 끼고 따라 부르는데도 음정 박자가 온통 엉망이다. 그래도 목소리만은 쩌렁쩌렁 병동을 울린다. 3주 동안 굶은 말기암 환자 목소리는 절대 아니다.

신기한 것은 다른 13명의 환자들이다. 불평 한마디 없이 잘도 참아낸다. 나 역시 이미자 씨의 '여자의 일생'을 엉터리로 불러대는 그녀의 노랫소리에 눈물까지 핑 돈다. 노래는 역시 음정 박자가 아닌 마음으로 부르는가 보다.

지난주 상담할 때 코빼기도 안 보이던 그녀의 아들들이 나타났다. 지난 금요일, 진료실에 있던 8개 의자가 부족해 간이의자까지 동원해 상담한 그녀의 대식구가 기억났다. 그때 분명히 아들이 있었는데. "아! 지난주 못 오신 일본에 계신다는 둘째 아드님이세요?" "아뇨. 저희가 박금자님 진짜 아들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상담했던 아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호스피스병동에서 대부분 환자와 가족은 삶의 비밀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15년 전 이혼했고, 생이별한 두 아들과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폭력적인 첫 남편과 헤어진 뒤 재혼했다. 재혼한 남편과도 두 아들과 딸아이가 있었다. 마치 과거가 없었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았다. 다행히 지금의 남편은 인자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위암은 잔인했다. 십이지장 바로 근처에 생긴 암 덩어리는 손 쓸 겨를도 없이 장을 막아 버렸다. 물이라도 마시면 구역질 때문에 식도가 찢어질 지경이다. 진단받자마자 말기암 환자가 되었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사람은 죽음이라는 충격을 비교적 쉽게 수용하는 것 같다. 깊은 삶의 그림자 때문인지 그녀는 마지막에도 밝았다. 그녀의 진짜 아들들은 긴 상담을 마치고 어머님 제사를 모시고 싶다고까지 했다. 자신들을 버리고 간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이해한다고 했다. 금자 할머니 인생도 마지막이 왔다.

마치 드라마의 반전처럼, 마지막에는 의심스러웠던 사랑이 확실해지기도 하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랑이 깨어지기도 한다. 남편의 애인을 호스피스병동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리기도 하고, 2억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몽땅 받은 동거녀가 간암에 걸린 환자를 병동에 살그머니 놔두고 도망가기도 한다. 남편이 곧 임종하는데 예약한 치아치료를 받으러 가는 아주머니도 있고, 임종실에서 빨리 떠나지 않는다고 술 마시고 와서 행패 부리는 엽기 남편도 있었다. 그런 일을 한 번씩 겪고 나면 나는 괜히 가만히 있는 남편을 속으로 의심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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