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고양이처럼-김은령

회색 길고양이 한 년이

마당 깊숙이 들락거리길 근 일 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새끼를 다섯 놈이나 낳았다

어느 날부터 고것들 쪼르르

심심찮게 눈에 띄고

고 이쁜 것들 보는 맛에

식구들도 쪼르르 마당으로 자주 출몰했다

야생의 습성은 제 영역을 찾아 떠난다기에

야생이 자라기까지만, 일방적 계약을 맺으며

밥 갖다 주는 노고를 자청했다

너무나 빨리 피둥피둥 호랑이새끼만한 덩치들

그들은 태생부터 영역을 가졌다는 걸

마당이 전부 그들의 것이었다는 걸

처음 은근슬쩍 다가온 한 마리 회색고양이에게

사실은 우리의 영역이 침탈당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것은

어쩌다 밥 때를 놓치게 되면

저마다 다른 몽환의 눈빛을 가진 여섯 마리의 고양이가

앞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알 수 없는 귀티도 풍기면서

현관 앞에 일렬로 포진할 때부터였다

당연한 일처럼, 손 한번 쓸 기회도 없이

때 맞춰 밥 갖다 바치는 형국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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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특수한 경험이 보편적인 깨달음으로 승화될 때, 시는 만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됩니다. 시인이 길고양이 한 마리에게 밥을 준 경험은 개인적으로 겪은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존재 간의 관계 문제가 되면 그 의미는 무한해집니다.

사람이 길고양이를 길들이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길들이는 엄숙한 계약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여러 관계의 그물망을 느끼고 문득 놀라게 됩니다. 이제 이 경험을 누가 시인만의 경험이라 하겠습니까.

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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