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예사롭지 않다는 보도에 개의치 아니하고 대구를 출발했다. 포항 장기에 있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유배생활 중 심었다는 은행나무를 보고, 다음 기청산식물원과 경북수목원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특히 노론의 영수로 충청도 출신이자 주로 기호지방에서 활동한 우암의 흔적이 '남인(南人)의 나라' 경상도 동쪽 끝자락 장기에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는 남인인 영남사람들과 늘 대립관계에 있었고, 높은 학문과 덕망에 비해 당파의 이익에 앞장선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어 장기초등학교에 닿았다. 교문 가까운 곳에 수세가 왕성한 은행나무가 있어 살펴보았으나 아니었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니 오석(烏石)으로 된 2개의 비가 보였다. 왼쪽은 귀부로 장식한 전통양식의 우암의 사적비이고, 오른쪽은 현대식 조형물로 만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사적비여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권력지향적인 우암과 달리 실사구시로 백성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긴 유배생활을 한 다산이 짧은 기간이나마 이곳에서도 머물렀다니 새삼 감개무량했다.
자료에 의하면 원래 우암이 심은 나무는 죽고 그 나무에서 돋은 싹이 지금의 나무로, 수고 20m, 가슴높이둘레 2.5m, 수관 폭이 8m, 수령이 320여 년(1972년 기준)이라고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원래부터 두 그루를 심었던 것 같고 한 그루는 죽고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 같다. 생육상태가 좋지 못해 영양제를 투입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운동장을 정비할 때에 뿌리가 손상되어 그런 것 같다. 하루속히 좋은 흙으로 생육 공간을 넓혀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후학에 의해 200여 년 핍박(逼迫)했던 남인의 나라에서도 위세를 꺾지 않으려는 듯 하늘 높이 가지를 뻗고 있다. 2001년 '우암 송시열 선생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운 사적비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남인의 집권과 동시에 실각하여 처음에는 덕원으로 유배되었으나, 1675년(숙종 1년) 69세 되던 해 윤5월 이곳 장기로 옮겨와 무려 4년 여를 보내고 1679년(숙종 5년) 4월 그의 나이 73세 때 거제도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다.
우암은 오도전이라는 선비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후 아들과 손자, 증손자도 합류하여 함께 생활했다. 우암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오도전은 나중에 향교 훈장이 되었다. 그가 장기를 떠난 후 오도종, 이석증, 황보헌 등 지역의 선비들이 그를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웠다.
우암이 장기에 머문 것은 본인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으나, 장기에 문풍을 진작시키고, 포항에 노론 인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저술인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정포은선생신도비문' 등은 이곳에서 쓰였다. 또 한적하기만 하던 고을이 우암을 찾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로 붐비고 장기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암 선생이 장기고을의 발전에 끼친 큰 음덕을 잊지 아니하고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의 협조로 사적비를 세운다."
우암이 유배 길에 오른 것은 대구 출신 유학자 도신징(都愼徵'1611~1678)이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 씨의 장례(葬禮)문제를 두고 올린 상소, 즉 2차 예송논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죄인인 그가 두 동생과 첩은 물론 아들과 손자 심지어는 노비까지 데리고 와서 마치 전원생활을 하듯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대 최고 실력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유박해(1801년)로 유배 온 다산은 불과 9개월 머물렀을 뿐이었지만 어민들에게 반영구적인 그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니 두 사람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장기는 이들 외에도 대사간 양희지(楊熙止),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등 거물들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비에 젖고 있는 장기초등학교를 나와 구룡포에서 전복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기청산식물원으로 향했다. 한평생을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이삼우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투박하지만 고풍스러운 오래된 목조, 야외 찻집에 앉아 낙수 소리를 들으며 장작불로 덥힌 차를 마시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빗물로 가랑이가 젖는 불편함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새로 조성한 연지(蓮池)며, 약초원을 보여주는 수고를 해 주었다.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경북수목원 방문은 뒤로 미루고 대구로 향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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