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잘못 말했다가는 '침묵'만 못한 결과를 얻는 것이 세상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잘못 내뱉은 말로 입방아에 오르기 일쑤다. 그러면서 말은 생존을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취업준비생들의 면접은 말이 당락을 좌우하고, 직장인들은 업무나 회식 자리 등에서 말을 잘해야 인정받는다. 말에 대한 부담감이 가중되며 '스피치 울렁증'을 앓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스피치 강좌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말을 잘해야 살 수 있다.
바로 아나운서란 직업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요즘 아나운서들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기본적인 능력에 더해 각양각색의 개성을 뽐내며 연예인 못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이러한 '팔색조 아나운서'가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더욱 늘고 있고, 아나운서 소양을 자기 직업에 접목시키려는 직장인들도 나타나고 있다.
◆스피치 울렁증 만연
이달 16일 오전 대구 수성구 대구스피치평생교육원 강의실. 수강생 30여 명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대학생 등 20대들이 많았고, 초등학생, 주부, 중장년 남성 등 남녀노소 다양했다. 이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강사의 주문에 맞춰 호흡법을 연습하거나 직접 작성한 원고를 낭독하기도 했다.
대구스피치평생교육원 이병욱(56) 원장은 "수강생은 2, 3년 전만 해도 중장년층이 많았지만 점점 스피치 강좌를 듣는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수강생의 절반가량을 차지한 20대들은 대부분 취업준비생들이었다. 면접 울렁증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란다. 김모(27) 씨는 "대부분의 기업에서 면접만 두세 번씩 보고, 임원들 앞에서 발표도 시키는 등 점점 면접 전형을 강화하고 있다. 공무원 등 면접이 중요하지 않던 직업군도 면접이 당락을 좌우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20대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중장년층 남성들. 이들 중 각종 사교 모임에서 회장을 맡은 사람은 연설 울렁증을, 총무를 맡은 사람은 MC(사회) 울렁증을 겪고 있다고 했다. 또 술잔을 돌릴 때 누구나 꼭 한 번은 해야 하는 관례인 건배사 울렁증은 공통의 고민이었다.
직장에서도 스피치 울렁증은 이어진다. 부하 직원은 상관에게 각종 업무 보고를 할 때마다 울렁거리고, 상관도 부하 직원들 앞에 서서 한마디씩 해야 할 때마다 긴장한다는 것.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족집게 스피치 과외를 받기 위해 스피치 학원을 찾는다는 얘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원장은 "평소에는 주변 사람들을 '휘어잡는' 스피치 능력을 자랑하지만 정작 중요한 선거 연설을 할 때에는 울렁증을 겪는 정치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스피치를 좀 더 세분화하면 스피치, 연설, 웅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스피치는 잘하지만 청중에 호소하고 설득하는 연설과 웅변은 서툰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
일반인들도 각종 취업 면접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평소 주변 사람들과 쾌활하게 지내지만 면접관 앞에만 서면 '합죽이'나 '얼음'이 돼 자기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대구 청년들이 특히 그렇단다. "정적이고 보수적인 대구 문화가 원인입니다.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 기관 등 사회 전체적으로 대화와 토론이 부족해요. 스피치 능력이란 것이 어떤 공식을 숙지하거나 방법을 안다고 향상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환경이 가장 중요하고, 환경이 여의치 않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러한 노력을 돕는 것이 호흡, 발성, 발음, 제스처 등 다양한 실습으로 구성된 스피치 강좌의 취지란다. "강좌를 통해 스피치 기술도 전수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수강생들은 당장 급한 취업 문제를 해결하고,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스피치 기술을 얻어가요. 그러면서 일상과 일생의 스피치에 주원료가 될 자신감도 한가득 얻어 갑니다."
◆스피치의 꽃, 아나운서
이처럼 스피치는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갈고닦아 빛내고 싶은 '꿈'의 소재이기도 하다. 바로 아나운서 지망생들이다.
요즘 방송업계에서 선호하는 아나운서 스타일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차분하고 단정한 이미지에 교과서적인 발음으로 또박또박 원고를 읽는 아나운서는 구식이 됐다. 호감 가는 이미지에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진 아나운서가 인기란다. 물론 수준 이상의 발음, 발성 등을 갖추는 것에 더해 자기만의 색깔도 내야 한다는 얘기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타 아나운서들이 대표적인 예다.
대구 아나피치방송아카데미 최윤정 원장은 "이전에는 정형화된 아나운서를 '만드는' 개념이었다면 요즘은 개성 있는 아나운서를 '발견하는' 측면이 강하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스스로 개성을 연구하며 몰랐던 자기 능력도 발견하는 것이 요즘 아나운서 교육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아나피치 방송아카데미 최윤정 원장)
최근 아나운서 수업을 듣는 일반인들이 부쩍 늘었다. 아나피치방송아카데미의 경우도 일반인 수강생 수가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수강생 수의 2배나 될 정도다. 이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아나운서 소양을 원하는 직장인들이다. 직장에서 행사를 진행하거나 안내 업무를 보는 직장인들, 발표나 보고 업무를 자주 하는 직장인들이 단정하고 신뢰감 높은 아나운서 스타일로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러 온단다. 주식 시황 설명을 좀 더 세련되게 하고 싶어 배우러 오는 증권사 직원도 있다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꿈에 스피치라는 날개를 달기 원하는 젊은이들이다. 김수윤(20'여) 씨는 "웅얼거리는 발음, 허스키한 목소리 톤 때문에 평소 말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교정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고 있다. 역도 스타 장미란 선수도 자기 인상이 험하다며 대인 관계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스피치 교육을 받고 자신감을 얻더니 결국 좋은 성적을 냈다"고 말했다.
조수아(20'대경대학교 모델과) 씨는 모델 및 연기자 지망생이다. 그는 말투가 또 다른 외모라고 했다. 조 씨는 "발음, 발성 등을 배워 호감 가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장기적으로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면서 풍부한 표현이 필수적인 연기자의 꿈도 키워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직 아나운서들도 자신이 배웠던 선생님을 수시로 찾아와 조언을 구한다. 대구의 한 케이블 방송사에 근무하고 있는 아나운서 고서연(26'여) 씨는 "원래 꿈은 아나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학원에서 목소리 트레이닝 수업을 들으면서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고 아나운서로 꿈을 바꿨다"며 "현직에 있으면서 수시로 학원을 찾아 부족한 점을 채운다. 지속적으로 자기 능력을 다듬으면서 빛을 낼 수 있는 아나운서 직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스피치의 핵심은 자신감
아나운서 수업의 핵심 역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최 원장은 "아나운서 수업을 들으며 말투가 예뻐지고 정갈해지면 남에게 계속 말을 하고 싶어진다. 말투는 물론 표정도 밝게 변하고, 인상도 호감형으로 바뀌면서 주변에서 계속 좋은 반응이 나오기 때문. 그러면서 얻는 것이 바로 자신감이다"고 말했다.
MC나 리포터 등은 생생한 표현 능력이 중요하다. 그 능력을 기르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 표정도 밝게 변한다. 홈쇼핑 방송의 꽃인 쇼호스트의 화법에는 자연스러운 설득의 기술이 녹아있다. 역시 대인 관계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화법이다. 이처럼 방송화법에는 일상 속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는 셈.
최 원장은 "말이 바뀌니 삶이 바뀌고 꿈이 생기더라"고 말했다. "한 수강생이 말을 예쁘게 하고 싶다며 찾아왔어요. 시비 거는 듯한 말투의 원인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죠. 하지만 그는 스피치 수업을 들으면서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됐고, 주변에서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좋아했어요. 어느 날 그가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상담을 신청했어요. 고졸 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꿈이 생겼으니 대학에 가겠다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대학에서 홍보도우미도 하며 아나운서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최 원장은 단순히 스피치 능력만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수강생들을 보며 감동과 보람을 함께 얻는다고 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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