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Ctrl C + Ctrl V" 몇번이면 "책도 논문도 뚝딱"

개성추구 목숨 건다는 세상 넘쳐나는 '짜깁기의 역설'

대학생들의 리포트에도 짜깁기 세태가 드러나고 있다. 창의적 사고를 담은 리포트는 찾기 힘들다.
대학생들의 리포트에도 짜깁기 세태가 드러나고 있다. 창의적 사고를 담은 리포트는 찾기 힘들다.
짜깁기 세태는 강의 콘텐츠에도 나타나고 있다. 지역의 한 강사가 신문제작을 위해 강의 장면을 연출해줬다
짜깁기 세태는 강의 콘텐츠에도 나타나고 있다. 지역의 한 강사가 신문제작을 위해 강의 장면을 연출해줬다
학위 논문에 대한 짜깁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학위 논문에 대한 짜깁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곡'의 저자 단테가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환생해서 2012년 대한민국짜집기의 현 주소를 본다면 '이건 너무 심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단테의 메시지는 100% 독창적 창의성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인데, 우리 사회는 남의 것으로 도배를 하고 있으니 진정한 내 지식, 나만의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과 이재문 교수는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에 대해 "완전한 창작이란 있을 수 없으며, 모방 뒤에 창조가 오는 것처럼 모방이 창조를 있게 하고, 모방을 넘어서 창조가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글은 남의 것을 훔쳐오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알게 훔쳐오고 프로는 모르게 훔쳐온다"고 덧붙였다.

김이듬 시인의 '별을 누르는 밤'이라는 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별 대신 전광판이 번뜩이는 거리, 우리가 늘 마주하는 삶의 조건들로 치환한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정보통신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오프라인 세상의 베끼기 문화는 온라인 짜깁기로 이어진다. 표절, 무단도용, 복사(복제)…. 창의적인 작품을 생산해야 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짜깁기 행태는 도를 넘고 있다. 초'중'고교 과제부터 대학생 리포트, 학위 논문, 강의 콘텐츠 등에서 '컨트롤 C(복사)+컨트롤 V(붙이기)'가 확산되고 있다.

◆대학생 리포트의 짜깁기 현실

경북대 IT대학 전자공학과 김민영(37) 교수는 매 학기 학생들의 리포트를 채점할 때마다 짜증과 한탄을 쏟아낸다. 리포트 10개 중 2개 정도만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과 공부한 흔적을 드러낸 것이고, 8개는 대부분 짜깁기 행태라서 채점이 무의미할 정도라고 한다.

김 교수가 말하는 리포트 짜깁기의 행태는 이렇다.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것이다. 학생들이 같은 출처에서 베끼다 보니 여러 리포트에서 같은 내용이나 문구가 등장한다. 이렇다보니 베낀 수준을 평가해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즉, 베낀 내용이 초보적인 수준이냐, 깊이 있는 수준이냐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는 것이다.

영남대에서 신문과 방송의 간사를 맡고 있는 이철우(43) 강사는 "학생들이 제출하는 리포트의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한 번만 검색해도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붙여 무성의하게 짜깁기한 것"이라며 "짜깁기 형태의 리포트는 일괄적으로 한 등급 정도 낮은 점수를 주고 있다"고 전했다.

10여 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요즘은 상대평가를 하기 때문에 학생들끼리 서로 베끼는 행태의 리포트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실제로 서로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한 작가의 개탄

"소설은 베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상당수 자기계발서들은 짜깁기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빠르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만에 책 한 권이 뚝딱 나옵니다. 또 청년들을 위한 좋은 말(격언'잠언 등)들을 모아서 마치 자신이 청년들의 멘토인 것처럼 책을 펴내는 유명인도 많습니다."

대구에서 활동 중인 한 소설가의 지적이다. 그는"자기계발서 대부분이 좋은 말들이나 자료를 가져와서, 이리저리 갖다 붙이고, 비슷한 주제로 단락을 나눠 출간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예전에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씩 자료를 모으고 현장 답사를 하고, 고민을 거듭해 책을 만들어냈다. 이에 비하면 요즘 상당수 저서들은 그 가벼움이 이를 데가 없다"고 했다.

강의 콘텐츠 역시 짜깁기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일부 전문강사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주제와 수강생들을 고려해 인터넷 등에서 각종 글은 물론 시청각자료까지 찾아서 갖다붙인 뒤 파워포인트(PPT)를 만들어 강의하고 있다. 이들은 독창성과 관계 없이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기존 자료들을 잘 짜깁기 하느냐에 승부를 걸고 있다.

대구에서 직장인을 상대로 8년째 강의를 하고 있는 한 강사는 "하나의 주제가 주어지면 그에 맞는 강의내용을 작성하는데 주로 인터넷에서 거의 모든 자료를 도용하고 있다"며 "제가 아는 거의 모든 강사들이 이런 식으로 강의내용을 만든다"고 했다.

◆생활 속 파고드는 짜깁기 세태

짜깁기 세태는 우리 생활 속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미네르바'(필명)는 미국의 투자은행(IB)인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 미국발 금융위기를 예고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전문가들 역시 그의 글에 무게를 실어줬다. 하지만 그는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됐다. 이때부터 미네르바는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로 인터넷에서 검색한 글을 짜깁기한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 최근 국내 대학 교수 3명이 미국 학술지에 기고한 공동논문이 캐나다 학자 논문 등을 베끼거나 짜깁기한 것으로 밝혀져 망신을 사기도 했다.

대학생 리포트 짜깁기도 도를 넘어서고 있다. '리포트 판매'라는 신종 아르바이트까지 생겨날 정도다. 리포트 거래의 대부분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뤄지며, 일부 업체는 회원수가 2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네티즌들이 온라인 결제로 구매를 하는데, 리포트 1개 당 가격은 1천~3천500원선. 대학생 진모(21) 씨는 "시간이 촉박하거나 주제가 어려워 쉽게 쓰기 힘들 때 여러 개의 리포트를 돈을 주고 사서, 그 리포트들을 다시 짜깁기한다"고 했다.

어린이들도 짜깁기 세태에 물들고 있다. 어린이 전용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방학숙제 섹션을 따로 만들고 어린이들의 방학숙제에 참고가 되는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어린이들은 이 자료를 참고용으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짜깁기해 숙제로 제출하고 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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