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농암면 농암 2리 258번지, 예나 지금이나 '동바리'로 통한다.
농암이라는 명칭은, 농암면 갈동리에 위치한 '농바우' '농바위'라고 부르던 고인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바위는 남방식 고인돌로 '큰바위 얼굴'로 상징성을 가진다.
'동바리'는 농암초등학교 옆에 있으며 농암장터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동네이다. 20여 호 정도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동바리 사과나무집'이 우리 집이었다. 사과나무, 벼농사, 콩, 참깨 등 농사를 지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일요일이면 사과나무에 약치기를 했다. 당시는 과수원 중간에 약치는 장치를 해놓고 아버지는 약통을 어깨에 메고 골골이 다니며 약을 치셨다. 그때 줄을 고르게 펴놓는 일은 내 몫이었다. 줄이 꼬이거나 접혀지면 약이 뿜어져 나오지 않기에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줄이 이어가는 상황을 잘 살펴야 했다. 그러나 어린 초등학생으로서는 그 일이 얼마나 하기 싫던지, 속으로 '일요일에 비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도 했다. 또 밭에는 콩을 주로 심었는데, 여름에 밭매는 일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한 고랑씩 매라고 하셨고 우리는 경쟁을 하듯 콩밭을 맸다.
나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 언니 오빠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던 유년의 기억은 나에게는 과분한 복이었지만, 심부름도 심심찮게 한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는 손님이 자주 찾아오셨다. 아버지께서 문경군청, 농암면사무소 등 공직과 관련된 일을 하셨기에 손님맞이는 엄마의 몫이었다. 때가 되면 엄마는 손님상 차리느라 신경을 쓰셨고, 나는 손님상을 물리고 나면 흰 쌀밥, 고기 반찬 등 특별한 반찬을 먹는 재미로 엄마의 고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언니 오빠 친구, 내 친구까지 친구들이 자주 왔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밥을 같이 먹이거나 간식거리를 주시곤 했다. 지금도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 와서 먹었던 밥과 간식이 그렇게 맛있었다고들 한다.
우리 집 바로 뒤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친구들과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소나무 타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풀꽃시계 만들기' 등 해가 꼴까닥 질 때까지 놀아도 신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일상 속에서도 나는 뜬금없이 사색을 하기도 했고 들판 너머 다른 세상을 꿈꿔 보기도 했다.
우리 집 안방에는 가족 말고도 계절마다 차지하는 것들이 많았다. 봄가을에는 누에를 치느라 좁았고, 가을에는 고추를 말리느라 냄새가 났고, 겨울에는 벽에 메주를 걸어놓고, 아랫목에는 고구마 장성 등 사람보다 차지하는 범위가 넓었다. 누에가 스멀스멀 기어나와 내 몸에 달라붙었던 기억, 고추벌레가 벽을 타고 기어올랐던 기억, 또 메주 뜨는 냄새, 고구마 썩는 냄새, 군불로 연기 냄새까지…. 안방은 그러한 북적거림 속에 문턱이 닳았다. 그중에서도 메주에 대한 기억이 곰실곰실 피어난다. 가마솥에 콩을 삶아 찧어 틀에 얹고 밟아, 새끼줄로 엮어 벽 쪽에 막대를 만들어 걸기까지 사람의 손이 몇 차례 가야 온전한 메주가 되었다.
"세상, 그 중간에서 꼬슬꼬슬 말라가는/ 제 속이 다 삭아야 비로소 진국이 되는/ 어머니 짭조름한 손맛, 켜켜이 배여 나온/ 매달리고 엉겨붙고 속속들이 뒤섞이며/ 가슴살 뜯어내듯 그렇게 뜬다는 게지 / 쫀득한 알갱이 풀어 시린 속을 다스리는~.' ('메주처럼' 전문)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갔다. 부모님의 교육관으로 우리 형제들은 어릴 때는 고향에서 자랐고 공부할 시기에는 대구로 전학을 했다. 내가 대구로 전학 온 이유는 오빠들 밥해 주라는 엄마의 뜻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대구로 이사 온 후 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목말라 많이 울면서 지냈다. 공부를 한 건지, 살림을 한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아팠던 시절이었다. 왕복 차비가 아까웠던 시절이라 방학이 아니면 고향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기다리던 방학이 되자 자취하던 반찬통을 챙겨들고 고향으로 갔다. 동대구역에서 점촌까지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가서 농암까지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당시 엄청난 홍수가 나서 농암에 진입하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연락도 안 되던 시절이고, 돈도 없던 시절이라 죽기 살기로 다리가 끊어진 곳까지 갔다. 철철 넘쳤던 물살 흔적이 곳곳에 상처로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지를 동동 걷고 물살을 봐가며 가까스로 강을 건너고 있었다. 어쩌랴, 나도 안간힘을 써가며 겁나는 물살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강을 건널 수밖에. 엄마를 만나는 순간, 펑! 눈물이 났다. 다행히 우리 집은 지대가 높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장터 사람들은 집을 잃고 초등학교 교실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었다. 살림살이가 그냥 둥둥 떠내려갔고, 심지어 개, 돼지, 토끼 등 기르던 동물들마저 떠내려갔으며 장터마을, 섬안마을 등 터를 잃은 동네도 있었다.
지금, 고향의 명소는 '대정공원'과 '쌍용계곡'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대정공원에서는 14회째 맞는 단오축제가 열렸다. 풍물한마당을 시작으로 마을대항 그네뛰기, 투호던지기, 제기차기, 팔씨름 등 민속경기와 면민노래자랑, 특별공연, 경품추첨, 게이트볼대회로 축제 분위기가 절정을 이룬다. 쩌렁쩌렁 함성을 지르는 숲과 사람들의 울림으로 고향은 즐거운 한때를 맞이한다.
쌍용계곡은 농암에서 쌍용터널 지나서까지 약 4㎞가량 펼쳐지는 계곡이다. 청룡과 황룡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으며 하류 쪽 계곡은 평온한 데 비해,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울창한 협곡을 이루며 물살이 급하다. 용소, 용추 등 한여름 계곡에는 젊음의 기운이 펄펄 끓는다.
이렇듯 '나의 살던 고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7월 낮 볕이 달아오르던 날! 농암들의 담뱃잎을 바라보는 재미는 흐뭇하다. 연간소득이 높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담배, 천연기념물 292호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는 화산리 반송, 7, 8월이면 피서객으로 즐거운 환호를 지르는 쌍용계곡, 5, 10일에는 오일장이 서는 장터,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정숲, 한우물 뒷산의 백로 서식지 등 내 고향 농암에는 몸과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쉼터가 많다.
지금도 우리 형제는 1년에 한두 번 고향에 모인다. 대가족이다. 중학교 교장으로 계시는 큰오빠 덕분에 가족이 모일 때마다 가족행사를 하곤 했다. 보에다가 천막을 쳐놓고 수영하던 일, 고디 잡으러 섬안 강가에 갔던 일, 밤 따던 일, 쌍용계곡에서 놀던 일, 추석 때 보름달 보며 밤늦도록 걷고 이야기하던 일, 쥐불놀이, 윷놀이 등 가족의 행복한 순간은 만날 때마다 줄곧 이어지고 있다.
세월이 더할수록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고향, 숲, 계곡, 뒷동산, 마을 들길에서 문득문득 줍는 마음의 말들, 싸한 기운이었다가 은은한 여운이기를 바라며 시를 찾는 일, 그 배경에는 고향을 향한 엄마표 그리움이 부얼부얼 끓고 있는 것을!
박희정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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