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통을 장구 마냥 걸머지고 각설이들을 따라 동네방네를 누비는 통에 어무이한테 두들겨 맞았던 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놈의 끼를 버리지 못해 탈춤부터 배웠심더. 가산오광대놀이부터 강령탈춤, 양주별산대까지 두루두루 배웠지예. 운명과도 같은 마당극도 그때 맛을 들였심더."
춥고 배고프다는 연극배우로 한 평생을 살아온 김헌근(51) 씨가 넋두리처럼 풀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다. 김 씨는 우리나라 연극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역 연극인이다. 그는 1999년 마당극에 모노드라마(1인극)를 접목시킨 새로운 형식의 연극 '호랑이 이야기'를 우리나라 최초로 선보였다. '호랑이 이야기'를 통해 그는 모노드라마가 국내 연극계에 뿌리를 내리는 단초도 제공했다. 모노드라마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그는 전국을 돌며 '호랑이 이야기'로 모노드라마 인기몰이를 주도했다. 그의 노력은 이후 '염쟁이 유씨'를 비롯해 많은 모노드라마가 제작되는 자양분이 됐다. 김 씨가 '호랑이 이야기'에 쏟은 세월은 벌써 13년이 흘렀다. 그는 '호랑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인극 전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호랑이 이야기'를 너머 연극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준비하고 있다.
◆운동권 출신 광대
김 씨는 1981년 경북대 임학과에 입학했다. 타고난 끼를 주체하지 못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민속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해 탈춤을 배우며 마당극 배우가 됐다. 독재정권이 서슬 퍼런 날을 세우고 있던 1980년대, 그는 탈춤과 마당극을 통해 자연스럽게 현실 문제에 눈을 떴다. "당시 마당극은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마당극이 현실 문제를 토로하는 공론의 장이었던 셈이죠. 그 때문에 마당극 현장에는 늘 경찰관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서도 많이 들락날락 거렸습니다."
그에게 있어 마당극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양심을 지키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수단이었다. 한시도 마당극을 떠날 수 없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전업 배우로 마당극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하기 위해 공부도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제 길이 아닌 길로 내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986년 졸업을 하고 1년을 백수로 살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제일 잘하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전업 배우로 살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마당극 전문 단체인 '놀이패 탈'에 들어가 전업 배우의 길을 걷던 김 씨는 1987년 김창우 경북대 교수를 만나면서 연극 인생에 전환기를 맞게 됐다.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이땅은 니캉 내캉'이라는 작품을 통해 마당극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선 것. "탈을 벗고 마당이 아니라 무대에서 공연을 한 첫 작품이 '이땅은 니캉 내캉'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연극 데뷔작인 셈이죠. 이후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궁궁을을' 등 김창우 교수님이 연출을 맡은 연극을 하면서 현장 중심의 마당극 대신 역사적이고 서사적인 연극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운명처럼 찾아온 '호랑이 이야기'
김 씨는 1991년 극단 '함께사는 사는 세상'을 창단했다. 전업 배우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상시로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1994년 후배에게 극단을 넘겨 준 뒤 '예술마당 솔'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바람에 당시 몸이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마침 최재우 선생님이 예솔마당 솔 대표로 취임하면서 일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가 없어 연극 일선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도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그도 연극 무대를 떠나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8년 '호랑이 이야기'를 통해 연극계로 돌아왔다. '호랑이 이야기'는 노벨상을 받은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의 작품을 김창우 교수가 각색한 것으로 중국 대장정에 참여했다 부상을 입은 한 홍군 병사와 호랑이의 기막힌 동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극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제가 안쓰러웠던지 김창우 교수님이 '호랑이 이야기'를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동안 연극을 하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여서 무조건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대본을 받아 연습을 해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1인극을 해 본 경험도 없는 제가 1인 다역을 소화해 내며 1시간 50분이나 되는 연극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연극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김 씨는 호랑이의 행동과 습성을 분석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달성공원으로 달려갔다. "대본 연습을 시작한 때가 겨울이라 호랑이가 우리에서 나오질 않아 관찰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러시아 서커스단이 부산 롯데호텔에서 호랑이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랑이 보러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호랑이를 연구하기 위해 호랑이 모습을 담은 비디오도 구해서 봤다. 심지어 팔공산에 가서 호랑이처럼 네발로 걸으며 "어흥"하고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김 씨는 자신의 연극 지평을 넓혀준 고마운 존재가 '호랑이 이야기'라고 했다. "배우 혼자 극을 이끌어 가야 하기 때문에 배우에게 1인극은 큰 부담이 됩니다. 위험 부담은 많지만 얻는 것도 많은 것이 1인극입니다. 1인극은 배우와 관객이 1대1로 호흡을 하는 연극이기 때문에 배우가 가진 에너지가 여과 없이 관객들에게 전달됩니다. '호랑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관객들과 더 잘 소통을 하고 어떻게 하면 관객들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수한 입담과 사투리가 성공 비결
'호랑이 이야기'는 1999년 6월 예술마당 솔에서 초연됐다. 반응은 뜨거웠다. 금세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그해 11월 서울 대학로에 진출해 한 달간 장기 공연을 했다. "당시 서울 공연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제작한 1인극이 대학로에서 장기 공연된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공연을 본 관객들 가운데 지방 공연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호랑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국에서 200회 이상 공연되며 1인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히트를 쳤다. '호랑이 이야기'를 본 사람들은 마당극에서 다져진 김 씨의 구수한 입담이 흥행을 이끌어 낸 가장 큰 힘이라고 평가한다. 모노드라마의 특성상 배우의 연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흥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호랑이 이야기'는 공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참여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연극이라 관객들 반응에 따라 공연 시간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관객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쌓았던 마당극 경험이 '호랑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꼽는 '호랑이 이야기'의 또 다른 인기 비결은 경상도 사투리다. '호랑이 이야기'는 점잖은 표준어가 아니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된다. 연출을 맡은 김창우 교수가 경상도 사투리로 각색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투리가 등장하는 연극과 영화, 드라마가 보편화되었지만 '호랑이 이야기'가 처음 공연될 당시에는 대구에서 만든 연극도 표준말로 공연을 할 정도로 사투리 연극이 드물었습니다. 사투리를 통해 지역 사람들에게는 친숙함을, 타지역 사람들에게는 신선함을 선사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염쟁이 유씨'의 유순웅 씨와 함께 새 작품 준비
김 씨는 '호랑이 이야기'를 키운 것은 시대라고 했다. '호랑이 이야기'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시대상을 반영하며 변화를 거듭했다는 것. 서울로 진출하면서 '호랑이 이야기'의 공연 시간은 1시간 50분에서 1시간 30분으로 줄었다. 지난 2009년에는 공연 10주년을 맞아 내용도 새롭게 각색했다. 당초 '호랑이 이야기'는 변증법을 통해 공산당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10주년을 맞아 '소통의 부재'라는 메시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이 홍군 병사에서 바우 할배로 바뀌었다.
김 씨도 '호랑이 이야기'처럼 변신을 꾀하고 있다. '호랑이 이야기'가 광대 김헌근을 전국적인 배우로 발돋움시킨 작품이지만 이제는 넘어야 할 산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양한 역을 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입니다. 한가지 공연만 하다 보면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특히 사고가 경직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배우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다양한 역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닫히는 것은 배우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신념을 가져야 하지만 배우로서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마음이 굳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라는 그는 마음을 풀기 위해 '두 남자'라는 새로운 연극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두 남자'는 대형마트가 들어설 예정인 경상도 어느 지역의 전통시장을 배경으로 50대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작품. '두 남자'는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고의 1인극 배우로 통하는 김 씨와 '염쟁이 유씨'의 유순웅 씨가 맡는다. 대본은 '염쟁이 유씨'를 쓴 김인경 작가가 썼다. 연출은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맡았다. 캐스팅이 화려한 만큼 공연을 준비하는 김 씨 입장에서는 부담도 크다. "연출가'작가 모두 지명도가 높다 보니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꿈에 '두 남자'가 나올 정도입니다. '두 남자'도 사투리 연극입니다. 저는 경상도 사투리, 청주가 고향인 유순웅 씨는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합니다. 1주일에 한 번 서울로 가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공연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는데 연말쯤이면 지역에서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지녁 문화 위한 호랑이의 일갈 "연극 살아야 뮤지컬도 사는데…대구시 정책 왜 거꾸로 가나"
기자는 김헌근 씨와 다양한 주제를 놓고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지면 관계상 제대로 소개를 못한 것 중에는 지역 연극계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연극이 살아야 뮤지컬'영화'드라마 등도 활성화되는데 대구시 정책은 뮤지컬 육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또 "지역 연극계 출신으로 서울에 진출한 선배들이 가끔 대구로 내려와 공연을 하면 지역 연극계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성실한 배우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호랑이 이야기'를 후배에게 물려 준 뒤 자신은 고전을 마당극 형식으로 각색한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의 꿈치고는 참 소박하다. 김 씨는 다시 태어나도 연극배우로 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연극배우의 장점으로 정년 없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을 꼽았다. 화려한 꿈을 꾸기보다 기본을 지키려는 그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한눈팔지 않고 연극만 열심히 하는 배우가 대접받는 문화는 배우 혼자 힘으로는 만들 수 없다. 관객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소박한 그의 꿈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
이경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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