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패션 넘은 생존의 도구, 가방의 속사정…유사시 대비할 '총알' 채워라

여성들의 가방 속 세상. 화장품, 다이어리, IT 전자기기 등이 공통된 소지품이다. 출처: 인터넷 사진 공유 서비스
남성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백팩은 크기가 커지고, 수납 주머니도 많아진 것이 특징이다. 대구백화점 제공
여성들의 가방 속 세상. 화장품, 다이어리, IT 전자기기 등이 공통된 소지품이다. 출처: 인터넷 사진 공유 서비스 '플리커 닷컴'(www.flickr.com)
남성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백팩은 크기가 커지고, 수납 주머니도 많아진 것이 특징이다. 대구백화점 제공

가방은 최근 패션 아이템으로 많이 부각됐다. 고가의 명품백 열풍은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면서 핸드백은 여자의 '자존심'이 된 지 오래다. 가방을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운 들것'으로 여기던 남성들도 가방 패션에 신경 쓰는 추세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가방의 속사정이 변화하며 나타났다. 가방 속에 들고 다닐 것이 많아진 '노마드'('유목민'이라는 뜻으로 자주 이동'이주하며 일하고 문화를 즐기는 요즘 세대를 가리킨다) 시대가 됐기 때문.

요즘 가방은 들것 혹은 패션 그 이상이다. 요즘 가방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은 가방 시대

'보자기'뿐이던 우리나라에 최초로 가방이 들어온 시기는 언제일까? 1883년(고종20년) 미국을 방문한 대사 민영익 등 11명의 사절단이 손에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때 가방은 무엇을 담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소품에 가까웠다. 양복 차림에는 한 손에 가방을 드는 게 격식이었던 것.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1895년 단발령 이후 왕실에서는 순헌귀비가 최초로 양장을 입었다. 이후 양장 스타일은 여학교의 교복이나 일반 여성들의 옷차림으로 퍼졌다. 이때 양장에 반드시 곁들여진 것이 바로 손가방이다. 그리고 요즘 핸드백과 유사한 스타일인 뚜껑 있는 돼지가죽 가방은 193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이 처음 들었다고 한다. 가방을 먼저 든 것은 남성들이지만 이후 가방 패션의 변천사는 여성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최근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남자와 여자의 가방 TPO(Time'Place'Occasion의 줄임말. 시간'장소'상황에 따라 의복을 다르게 착용해야 한다는 것) 차이를 빗댄 사진이 올라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사진 내용에 따르면 여행'쇼핑'파티'등교 등의 상황에서 남자는 똑같은 책가방을 계속 메거나 가방 없이 나선다. 반면 여자는 상황별로 여행가방, 쇼핑가방, 파티용 핸드백, 책가방을 준비한다.

◆그 여자의 가방 속사정

직장인 김모(31'여) 씨가 보유한 가방은 20여 개. 많은 편일까, 적은 편일까. 김 씨는 "나는 보통인 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10개는 핸드백이다. 매일 출근하며 입는 정장과 구두가 다르듯, 어깨에 메는 핸드백도 다르다"고 말했다.

김 씨는 최근 "핸드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단다. 그래서 그가 지난 1년 동안 구입한 여러 개의 가방이 일명 '빅백'이다. 기존 핸드백에 비해 크기가 두세 배는 된다. 하지만 디자인은 핸드백 못지않게 세련된 것이다.

김 씨는 "직장을 다니며 가방에 넣고 다녀야 할 것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노트북'태블릿PC'스마트폰 등 들고 다녀야 할 IT 전자기기가 많아졌어요. 어디서든 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죠. 패션뿐만 아니라 개인 능력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아이템이 바로 빅백입니다." 그 외에도 미니 화장대(꺼내서 펼쳐놓으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는 각종 화장품과 화장도구들), 두어 권의 다이어리(스마트폰엔 일정을 기록하고 다이어리엔 그때그때 감성을 기록), 매일 10페이지씩 읽는 자기계발서와 시집, 여자라는 이유로 늘 챙겨야 하는 위생용품, 심지어는 개인용 물컵과 작게 접을 수 있는 플랫슈즈까지. 웬만한 '살림살이'를 들고 다니려면 빅백은 필수란다.

이에 대해 '여자의 가방'의 저자인 프랑스 사회학자 '장 클로드 카프만'은 "만약의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갑자기 중요한 미팅이 생기고,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갑자기 어딘가에서 기다리게 될 경우를 대비해 각각 중요한 업무서류'두통약'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 점점 바빠지는 요즘 여성들의 사정이 가방의 속사정도 바꾼다는 얘기다.

이렇듯 여자의 가방에 찍히는 방점은 멋에서 실용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결코 변치 않는 핵심은 '여자에게 가방은 자존심'이라는 점이다. 김 씨는 "여자에게 가방은 패션의 완성이다. 그날 코디에 '화룡점정'을 하는 셈"이라며 "현대여성들이 들고 다녀야 할 것이 많아지든 적어지든 가방은 그에 맞춰 모양을 바꿀 뿐이다. 가방이 먼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을 제한하고 규정짓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가방 브랜드들은 여성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재깍재깍' 가방 디자인을 바꿔 내놓을 수밖에 없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모 백화점에서 의류와 가방을 구입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1회 구매 시 단가를 조사했더니 가방 구매 시 평균 단가가 30만원이었다면 의류 구매 시 단가는 절반 정도인 14만원에 불과했다. 그래서 의류는 최근 저가의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반면 가방은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 씨는 "옷은 저렴한 브랜드를 걸치는 대신 값비싼 가방으로 포인트를 준다"고 말했다.

◆그 남자의 가방 속사정

여성에게 가방은 신체의 일부와 같지만 남성에게 가방은 '사족'이었다.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입고 벨트를 하고, 신발을 신는다. 조금 더 멋을 부리자면 손목에 시계와 팔찌를 차고, 모자를 쓰고, 목걸이에 귀고리 정도를 한다. 그런 다음 손에 들까말까 고민하는 것이 바로 가방이었다는 것. 한마디로 들고 다니기 번거롭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이었다. 종종 술에 취해 어디 놔뒀는지 몰라 잃어버릴 거라면 아예 들고 다니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것.

하지만 최근 남성들도 이것저것 들고 다녀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가방을 챙겨 메고 있다. 직장인 박모(35'대구 남구 대명동) 씨는 최근 수납 주머니가 10개가 넘는 '백팩'을 구입했다. 기존 들고 다니던 서류가방은 장롱 속에 고이 모셔 놓았다.

박 씨는 "군대에서 배낭을 메고 행군하던 때가 생각난다. 요즘 일상이 그렇다"고 했다. 처음에는 가방 속에 노트북이며 각종 서류를 깔끔하게 정리해 넣었다. 점점 슬림한 디자인의 옷이 유행하면서 실루엣을 망치게 된 소지품들도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수납 공간이 남아서 남성용 뷰티 용품과 술자리 대비용 보약 등도 넣게 됐다. 영업직에 종사하는 박 씨는 "이 가방은 전투와 같은 일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무기인 셈"이라며 "기존 서류가방이라면 이 소지품들을 모두 넣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성들도 '이왕이면 패션이 되는 가방'을 선호하고 있다. 몇 년 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조인성이 정장 차림에 투박한 서류가방이 아닌 명품 백팩을 메고 등장하며 남성들도 본격적으로 가방을 패션으로 인식하게 됐다. 이는 젊은 남성들뿐만 아니다. 최근 장동건 등 40대 '꽃중년'들의 사랑과 성공을 그린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인기를 끌면서 중장년층도 드라마에서 유행한 서류가방 등을 많이 찾고 있다는 것.

◆멀티 가방 시대

가방 속에 이것저것 많이 넣지만 그래도 부족해서 가방 여러 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15개월 된 아들을 둔 김유정(34'대구 북구 침산동) 씨. 이전에는 외출할 때 핸드백 하나면 충분했지만 출산 후 가방이 하나 더 늘었다. 일명 '기저귀 가방'이다. 이전에는 '아줌마' 분위기를 풍기는 촌스러운 디자인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미시족들을 위한 세련된 핸드백형 디자인이 대세란다.

김 씨의 핸드백 안에도 가방이 하나 더 있다. 요즘 유행하는 '이너백'이다. 요즘 나오는 가방에 부속으로 딸려 있는 경우가 많고, 따로 구입할 수도 있다. 이너백은 가방에 들어 있는 수많은 소지품을 분류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 여성들에게 인기다. 또 이너백만 들어도 파티 등에서 멋을 낼 수 있는 디자인의 제품도 많이 나오고 있다.

태블릿PC 등 다양한 IT 전자기기가 보급되면서 따로 가방을 마련하기도 한다. 대학생 권혁인(27) 씨는 커다란 책가방 외에도 노트북 가방, MP3 가방, 스마트폰 가방을 더 들고 다닌다. MP3와 스마트폰의 경우 보호용 케이스를 덧씌워 손에 드는 정도였지만 최근 가방을 마련해 집어 넣었다. 특히 노트북 가방은 책가방보다 2배 비싼 20만원대 유명 브랜드 제품이다. 권 씨는 "모두 고가인데다 충격에 민감한 전자기기들이고, 챙겨야 할 부속 액세서리도 많아서 가방이 필요하다"며 "실은 전자기기들을 모두 보물처럼 애지중지하기 때문에 각각 멋진 디자인의 가방을 마련한 이유가 크다"고 말했다.

주5일 근무 시대에 각종 레저 및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면서 가방 갯수도 늘고 있다. 직장인 김모(45'경북 경산시 옥산동) 씨는 "차 안에 늘 골프 가방, 낚시 가방, 피트니스 가방, 축구화 가방, 여분의 운동복을 넣은 가방 등을 넣어 다닌다. '자동차'라는 가방 속에 다양한 취미용 가방들을 넣어 다니는 셈"이라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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