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출렁이는 동해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큰아들을 잃은 슬픔에 조부모님은 삼 남매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외가는 근동에서 유명한 '전 진사댁'이었다. "막내는 떼어놓고 가라"는 외조모의 절규를 뒤로하고 마음 추스르면 고향에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혀버렸다.
아버지는 노총각이 되었지만 혼처가 들어오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북쪽의 빨갱이 출신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게 민심이었다. 마을 훈장이었던 아버지를 여윈 어머니는 서울에서 자매들과 생활하고 있었는데 삼촌의 호출이 떨어졌다. 잠시 다녀갈 일이 생겼다고. 이를 어쩌나, 살림이 궁색한 삼촌은 좁쌀 두 가마니에 질녀를 시집보내겠다는 약조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신혼집을 지었다. 동리 지형이 조리를 닮았다는 곳에 아름드리 나무를 베고 터를 잡은 것이다. 동짓달 신혼 첫날밤, 아버지는 메밀 가마니에서 어른 머리통만한 고구마를 꺼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린 사랑의 증표는 아궁이에서 잘 구운 고구마였던 것이다.
그 신혼집에서 육 남매는 태어났고, 조부모님과 아버님이 실향의 그리움에 애를 태우다 눈을 감으셨다. 육 남매가 울고 웃으며 알콩달콩 꿈을 꾸며 자라고 떠나온 고향집, 그 집에는 자식들이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하기를 소망하는 어머님이 계신다. 어머니는 안온한 빛으로 자식들의 바라보아 주고 인도해 주는 등대이시다.
▷자전거에 대한 회상
상주시 화남면 평온2리 414번지. 근동에는 우리 집에만 자전거가 있었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의 최초 지점에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도회지로 이사 나오라는 이모부의 권유가 있었으나 조부모님의 반대로 아버지는 시골에 안주하셔야 했다. 자전거 뒤에 실린 가방에서 뽀빠이 모양의 딸랑이 칫솔을 꺼내 주었을 때, 내 기준에서 보는 아버지는 엄청 훌륭한 부자였다. 아마 부모님이 도회지로 이사했더라면 나의 고향은 상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동그라미 두 개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아버지의 튼튼한 다리와 웃음 띤 모습이 좋았다. 오빠들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반질하게 윤기 나도록 기름칠한 자전거는 오빠의 전용 자가용이었고, 오빠 허리를 꽉 껴안고 달리면 얼굴에 닿는 바람이 신선했다. 그러나 그 자전거가 성난 황소로 돌변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외가 다녀오는 길에 비포장도로에다 나를 내동댕이친 것이다. 외할머니가 주전자에 담아 준 고추장장아찌를 뒤집어쓰고 비포장도로에 널브러졌다. 온몸이 고추장과 피로 범벅이 되었다. 기가 막힌 것은 동생이 자전거에서 떨어졌는데도 오빠는 쌩쌩 달려갔던 것이다.
중학교 때, 다른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나는 끝내 자전거를 거부했다. 장아찌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전거 뒷자리는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시험공부 하다가 막차를 놓치면 달빛에 여린, 간드러진 허리 휘감기는 코스모스 길을 조희도 선생님이 태워 주셨고, 친구 집에 대표로 문상 가는 길에는 좁다란 농로를 휘청휘청 태워주는 선배 오빠가 있었다.
▷충효의 고장 화령
화령(化寧), 도로망이 좋지 않은 옛날에는 화령을 지나 백두대간을 넘어야 영남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주로 가거나 서울이나 청주를 갈 때에도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으니 그 역사적 지리적 의미는 컸으리라. 지금은 더 발달된 교통망을 자랑한다.
화령에는 수령 500년의 천연기념물 반송(盤松)이 정좌하고 있다. 상현리 반송은 일반 소나무와 비슷하지만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전체적으로 우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장관이다. 500년의 역사는 그 옆에 또 자리하고 있다. 왕자의 '태'를 봉안한 산이 있으니 도성에서 먼 거리까지 온 깊은 연유가 있지 않았을까. 태실의 주인공은 연산군의 원자인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태항아리를 파헤쳐갔다. 지금은 태실(석함)만 세워져 있고 태항아리는 상주박물관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하여 그 산을 태봉(胎封)산이라 부른다.
명당길지인 화령장 인근에는 하송리에 후백제 견휜왕의 사당, 봉촌리에는 화령고성과 성산산성, 금산리에는 봉산서원이 있다. 사산리에는 옥연사와 효성을 불살라 버린 갸륵한 꽃송이, 효자 정재수 기념관이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신봉리에는 석조보살입상과 비석거리가 지나는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화령에 가면 눈에 확 띄는 곳이 있다. 바로 '화령장지구 전적비'이다. 상주 방향에서 들어가는 초입의 화령재(해발 320m)를 넘어서면 봉황산 국도변 북편 언덕에 백전불굴의 전투상인 4m의 칼과 국민총화 단결상인 2.4m의 방패 조각이 웅장하게 자리한다. 전승비 광장에는 전쟁당시 사용하던 탱크와 장갑차가 전시되어 있다.
화령은 속리산과 주흘산으로 연결되는 지대로 국도와 국지도 등 2개 도로의 접합점이 있어 소백산맥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개전 이래 계속 후퇴만 거듭하다가 유엔군이나 공군의 지원 없이 대승을 거둔 6.25전쟁 3년 중, 최초의 승전지였고 최대의 전승지였던 것이다.
화령장 전투에서 적의 주력부대가 섬멸됨으로 인해 낙동강 방어진지 구축 등에 시간의 여유를 가지게 되고 전세를 만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의 '다부동 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곳이 화령장전투이다. 현재까지도 그때의 국군부대를 '화령대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화령에 가면 역사가 살아있다. 꿈뜰꿈틀 살아 있다.
▷사랑하는 고향
산의 정수리를 찧는 공사가 한창이다. 첩첩산중 깊은 골이 쿵쿵거리는 소음으로 많이 야위었다. 집 앞의 국도는 마을길이 되고 고향집 하늘에는 고가도로가 웅장하게 날개를 폈다. 산그늘 내리면 큼지막한 별꽃이 뚝뚝 떨어지는 곳, 동그라봉 고갯마루에 초승달이 다리 펴고 쉬었다 가던 곳이 이제는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겠구나.
동그라봉에 올라 오빠들과 연을 날리고, 정월대보름날 쥐불놀이 하다가 파출소 순경의 호각소리에 놀라 줄행랑치던 골목. 바짓가랑이 붙잡고 깡통 차기와 자치기를 하며 따라 다니던 막내가 귀찮기도 했겠지만, 잘 챙겨주었던 오빠들. 냇가에는 고디와 가재도 많았고 피라미도 많았었지. 산딸기 넝쿨 아래 징그러운 배암이를 몇 마리씩이나 칡넝쿨에 묶어오던 작은 오빠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오빠들의 이름을 등에 걸고 기세등등하던 나를 보며, 가시내가 건방지다며 싸움을 붙이던 재덕이네 형. 재덕이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데 맨들한 빡빡머리 재덕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더듬으니 재덕이의 귀였다. '울면 진다. 나는 너에게 지지 않는다.' 내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뽑혔지만 나는 끝내 울지 않았고 귀가 떨어져나간다며 재덕이가 울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미더운 재덕이와 막걸리 한 잔 나눠야겠다.
동리에 있던 초등학교는 마음을 아리게 한다. 고모가 다니고, 언니 오빠들과 나도 다녔던 학교이다. 화단에 돌탑 쌓고 꽃모종 심던, 고사리 손때가 묻은 학교를 보면 눈앞이 뿌예진다.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책을 읽고 '고전읽기'대회에 나가서 시험을 치렀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와 '안데르센 동화집', '이순신 장군' 등, 읽는 것이 좋았고 쓰는 것이 좋았다. 폐교가 돼버린 학교는 시력 잃은 몰골로 덩그마니 마주한다.
때때로 일상에 지친 날은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나에게 힘이 되고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탁본처럼 선명한 유년이다.
노정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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