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한적한 흙/ 고영민

군자란 화분에 꽃대가 올라왔다

작년에는, 재작년에는 기다렸지만 꽃은 오지

않았다

잠깐 왔다 가는 것이 그리도 힘드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중얼거렸고

꽃이 와 머무는 동안은

보름 남짓

좁다란 화관을 쓰고 당신은 발목 없이도

기일(忌日)까지 거닐 터이니

마른 흙 위에

무얼 쥐어 들려 보내야 하나

출렁출렁 물 한 바가지 앞섶을 적시며 들고 와

흙 위에 서너 번

나누어 부어주고 돌아서는

뿌리 젖은,

이승의 저녁

좋은 시는 시를 다 읽고 나서도 쉽게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긴 여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운은 표현된 말로는 모두 전달할 수 없는 남은 의미들의 물결입니다. 그것이 시를 읽고 나서도 마음의 한 자락을 파도처럼 계속 건드리는 겁니다.

군자란이 꽃을 피웠을 때 무엇을 해주고 싶은데 마땅히 해줄 것이 없을 때 느끼는 안타까움, 그래서 출렁이는 물 한 바가지를 들고 와서 조심스레 물을 부어주는 그 마음의 저 깊은 뒤안이 바로 이 시의 여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승의 저녁은 이렇게 뿌리가 젖어 있는 것입니다.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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