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300km로 제한하고 있는 한미 미사일지침을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개정을 위한 협상이 벌써 19개월째로 접어든 상황에서 한국의 입장이 선뜻 반영되지 않자, 한 보수 신문은 미사일지침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대대적인 기획기사를 내보내고 있고, 정치권과 언론계도 이 논조에 대부분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한미 미사일지침이 개정, 또는 폐기되어야 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 논점에서 정리된다. 첫째는 안보이익의 관점인데, 북한의 탄도미사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한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도 사거리와 탄두(彈頭)의 중량을 늘려 대북억지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국방주권의 논리로서 '경제 톱10'에 진입한 한국이 탄도미사일 사거리와 탄두 중량을 늘리는 결정까지 일일이 미국의 간섭을 받는 것은 국가위상에 맞지도 않고 부당하기까지 하다는 주장이다. 적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할 수 있는 무기체계의 확보는 자주국가의 주권에 해당하는 정책결정이기 때문에 동맹국인 미국이라도 더 이상 관여해서는 안 될 사안이라는 것이다.
안보이익을 위해 탄도미사일 사거리와 탄두 중량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무인항공기(UAV) 탑재 중량과 우주개발능력을 제한하는 조항도 개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미사일지침 개정논의를 '국방주권'의 영역으로 비화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국방주권의 논리에서만 본다면 전시 상황에 한국군을 단독으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환수해 오는 것만큼 시급한 사안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 상 어느 자주국가가 전시작전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느냐'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방주권 논리가 당시 다수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전시작전권 이양은 미국이 자국의 세계전략 수정 차원에서 먼저 제안했었고, 그렇다면 안보 공백을 최소화하며 이를 차질 없이 이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어야지 국방주권 논리로 포장해 정치쟁점화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논의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미사일 개발능력 하나 마음대로 확보 못 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식의 여론몰이는 철저하게 안보현안이어야 할 미사일지침 개정논의를 정치쟁점화할 개연성이 크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대북억지력을 제고할 수 있는 미사일지침 개정방안을 차분히 논의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논의를 국방주권의 논리에 가둬 두면 감정 섞인 소모적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대선을 목전에 두고 불필요하게 반미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 지금의 국민정서를 감안하면 만약 협상이 결렬되거나 우리의 입장이 대폭 수용되지 않을 경우 미사일지침을 일방적으로 폐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할 것처럼 보인다. 광우병 소동 때와 같은 대규모 반미 촛불집회라도 열릴 분위기다.
한국의 국력이 미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일취월장했지만 한미 군사동맹은 기본적으로 비대칭 동맹이다. 양국이 성숙한 동반자관계를 지향하는 가치동맹을 표방하고 있지만 동맹의 비대칭적 성격은 여전하다. 비대칭 군사동맹 관계에서 힘이 약한 파트너는 어느 정도의 국방주권 제약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정치의 엄연한 현실이다. 반드시 동맹관계 때문만이 아니라도 각종 글로벌 거버넌스와 국제 규범에 의해 국가의 주권이 일정 부분 제약받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화 시대의 특성이다.
한국은 미사일 기술통제 글로벌 거버넌스의 양대 축인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와 헤이그미사일행동규약(HCOC)의 회원국이다. 금년에는 HCOC 의장국 자격으로 정례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글로벌 거버넌스에 적극 참여하고 국제 규범 확립에 선도적 역할을 하며 성숙하고 책임 있는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G20와 핵안보정상회의를 모두 개최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국력이 신장한 만큼 국방주권도 확보하고 미사일 개발을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고 근시안적이다. 물론 미사일지침을 개정해서 적절한 대북억지력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특수한 안보상황을 강조하는 미사일지침 개정논의가 이루어져야지 국방주권과 국가위상을 주장하는 개정논의는 국제사회의 호응을 받지 못할 것이다.
김재천/서강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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