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자에 이어 고복수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사막의 한'은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타향'처럼 망국의 설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실어서 표현했습니다. '타향살이'의 원제목은 '타향'이었는데, 이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 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고복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꿔 음반을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 가요의 본격적인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만주 하얼빈 공연이나 북간도 용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가 기어이 통곡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공연 전에 이 노래에 대한 자료를 결코 알려준 적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청중들의 요청에 의해 4절이나 되는 노래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불렀다고 하니 그날 극장의 뜨거웠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입니다.
고복수의 대표곡들로는 '휘파람' '그리운 옛날' '불망곡' '꿈길천리' '짝사랑' '풍년송' '고향은 눈물이냐' 등입니다.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민족의 근원을 다룬 내용들입니다.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도 원래는 '갈매기 항구'란 노래로 고복수 취입으로 예정돼 있었는데, 이난영에게 양보를 해서 만들어진 가요곡입니다. '짝사랑'에 등장하는 노랫말 '으악새'는 억새라는 식물인지 왁새라는 이름의 조류인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가수 고복수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지만 불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돼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 경영과 운수회사의 잇따른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게 했습니다. 기어이 전집물을 들고 서울시내 다방을 떠돌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서적 외판원이 되었던 슬픈 장면을 되새겨 봅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이처럼 훌륭했던 민족가수 한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손목인의 곡으로 대표가수가 된 고복수는 작곡가 손목인에게 평생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병상으로 문병을 갔던 손목인에게 고복수는 "보고싶었습니다. 선생님!"하고 흐느끼며 손목인을 안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가요사에서 이젠 불후의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 간 이 땅의 농민들은 무려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관서 관북지역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역사적 사연과 아픔을 생각하면서 '타향살이'를 일부러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동순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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