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보는 거야. 결혼은 했어?" "어, 아들 하나 두고 있어" "딸이 좋은데 둘째는 꼭 딸 낳아" "나는 아들만 둘이야" "어떡해~" 오랜만에 만난 여자 동창들이 요즘 흔히 주고받는 대화다. 아들을 낳아야 목에 힘을 주고 살던 시대가 저물고 딸을 낳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됐다. 여아선호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아들 둘을 낳으면 '금메달'이 아니라 '목메달'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유행하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의 퇴조는 사회에 부는 여성 파워와 무관하지 않다. 9급 공무원 시험뿐 아니라 각종 고시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의 강세 현상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남성들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분야도 하루가 다르게 문호가 개방되고 있다. 올해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여군 고속정장이 탄생해 여성 해상지휘관 시대를 열었다. 카레이스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달 21일 열린 헬로모바일 슈퍼레이스 야간경기에서 여성 카레이서 2명이 기라성 같은 남자 선수들을 제치고 2, 3위를 차지해 여성 카레이서 시대를 예고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전 대표가 여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하면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집안의 주도권까지 여성에게 넘어간 가정들이 많다. 수많은 남자들은 직장에서 상사 눈치, 집에서 아내 눈치를 봐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급기야 남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남성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해방 후 가부장적 권위에 억눌린 여성의 권리 보호를 위해 여성운동이 벌어진 지 70여 년 만에 상황이 많이 바뀐 셈이다. 여성이 우대받는 시대, 달라진 세상 풍경을 스케치했다.
◆아들 낳은 것이 죄?
여섯 살과 세 살 된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주부 서희정(40'대구 수성구 수성동) 씨. 그녀는 "지인들에게 아들이 둘이라고 말하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 웬만해서는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들 낳은 것이 잘못도 아닌데 사회 분위기로 인해 아들 가진 부모의 마음은 괜히 움츠러든다"고 말했다.
'딸 바보'(딸을 각별히 아끼는 아버지)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여아선호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결혼정보회사 레드힐스가 올 6월 남녀회원 600명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자녀 성별'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성의 69.7%, 여성의 51.7%가 딸을 선택했으며 아들을 선택한 응답자는 남성의 경우 7.3%, 여성은 16%에 불과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딸을 좋아하는 경향은 초혼'재혼 여부와는 관련이 없었으며 연령이 적을수록 딸을 선택하는 응답자가 많았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집안 어르신(조부모)들의 가치관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전통적으로 손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요즘에는 손녀를 좋아하는 어르신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초등학교 1학년인 큰딸과 다섯 살 된 둘째 딸을 두고 있는 주부 김모(39'대구 달서구 이곡동) 씨. 그녀는 장남과 결혼을 한 까닭에 둘째 딸을 낳은 뒤 셋째 출산 문제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시부모에게 손자를 안겨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셋째를 낳아도 아들이라는 보장이 없고 아이 셋을 키우는 것도 부담이 돼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시부모님이 '요즘에는 딸이 대접받는 사회다. 굳이 아들 안 낳아도 된다'는 말씀을 해줘서 고민을 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아를 선호하는 현상은 입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대구경북에서 입양된 132명의 아동 가운데 남아는 32명인 반면 여아는 100명에 달했다.
홍상욱 영남대 가족주거학과 교수는 "과거에 비해 남녀평등 의식이 강해지고 남자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퇴색되면서 키우면서 얻는 즐거움이 많고 출가 후에도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딸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가정이 많아진 것도 여아선호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아들보다 딸을 키우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여아선호 사상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딸 낳는 비법 난무
딸을 원하는 부모들이 많아지면서 딸 낳는 비법으로 알려진 속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 아들 낳는 비법이 성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이다. '배란일을 아는 것이 아들과 딸 가려 낳기의 기본입니다. 여자의 질은 강한 산성을 띠다 배란일이 가까워지면 알칼리성으로 바뀝니다. 아들을 낳게 하는 Y염색체는 산성에 약하고 알칼리성에 강한 반면 딸을 낳게 하는 X염색체는 산성에 강합니다. 그러므로 딸을 낳으려면 배란 2, 3일 전에 부부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된 딸 낳는 방법이다. 이처럼 인터넷에는 딸 낳는 비법이라고 소개된 각종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다. 심지어 딸 낳는 방법을 알려주는 병원도 등장했으며 딸 낳는 약으로 알려진 제품도 온라인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딸 낳는 약으로 알려진 젤리 형태의 제품은 젤리를 여성의 질 속에 주입해 산도를 변화시켜 딸을 낳게 해준다는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판매업자들은 "효과도 좋고 안전성도 보장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알칼리성 혹은 산성으로 아이 성별이 결정된다는 설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무분별한 제품 사용은 위험하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2015년 여초(女超) 사회 진입
남아선호 사상이 옅어지면서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수)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지난달 1일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추계에 따르면 출생 성비는 1990∼1995년 114.6에서 2005∼2010년에는 106.9로 낮아졌다. 통계청은 2030∼2035년에는 출생 성비가 105.4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통계청은 전통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영남권의 출생 성비가 크게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1990∼1995년 대비 2030∼2035년 출생 성비가 가장 많이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 시'도는 경북-대구-경남의 순이었다.
여아선호 사상에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의 평균 수명보다 긴 현상이 겹쳐지면서 2015년 여성 인구가 남성 인구를 초월하는 '여초 사회'로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됐다. 인구추계에 따르면 2015년 여성 인구는 2천531만5천 명으로 남성 인구 2천530만3천 명보다 1만2천 명 많을 것으로 추산됐다. 여성 인구가 남성 인구를 추월할 것으로 전망되기는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60년 이후 처음이다.
통계청은 여초 현상은 2015년 이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남성 인구는 2029년 2천590만9천 명을 정점으로 줄어들지만 여성 인구는 2031년 2천626만2천 명까지 늘어난다는 것. 이에 따라 전체 성비(여성 100명당 남성 수)도 2010년 100.4에서 2020년 99.4, 2025년 99.0, 2030년 98.6으로 하락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됐다.
◆'서서 쏴'→'앉아서 쏴'
직장인 김모(44) 씨는 좌변기 앞에 서서 소변을 보면 위생적으로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변기를 청소하는 데도 손이 많이 간다는 아내의 말에 따라 집에서 소변을 볼 때 여성처럼 앉아서 볼일을 본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44) 씨도 마찬가지다. 이 씨는 "남자가 여자처럼 앉아서 볼일을 보는 것이 마땅치 않아 좌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라는 아내의 말을 한동안 듣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몇 해 전부터 앉아서 소변을 보고 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고 했다.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서서 쏴' 자세를 포기하고 가정에서 좌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보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이는 가정의 주도권이 여성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로 꼽힌다. 남성 고유의 용변 자세를 교정하려는 아내의 잔소리를 그냥 흘려 들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집안의 실세로 자리 잡았음을 나타내는 자료는 또 있다. 지난해 7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기혼직장인 504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4.2%가 '가정경제 활동권을 아내가 갖는다'고 대답했다. 반면 '남성이 가정경제 활동권을 갖는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사회 곳곳에서 부는 '남보원' 바람
한때 KBS2 TV '개그콘서트'에서 남성들의 인권을 강조한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 코너가 인기를 끌었다. 여권이 신장되면서 사회 곳곳에서 '남보원'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던 남성 3명은 여성에게만 입학 자격을 주는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입학 규정은 성차별에 해당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소원을 낸 남성들은 "법조인이 되려면 반드시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해야 하는데 남성은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할 수 없어 근거 없이 성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과 직업선택의 자유, 교육을 받을 권리가 침해됐다"고 주장했다.
대학에서는 여학생휴게실 대신 남학생휴게실 개설 바람이 불고 있다. 그동안 휴게실 측면에서 여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인 차별을 받았던 남학생들의 권리를 찾아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경희대, 동아대처럼 남학생휴게실을 설치하려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에는 남권 회복을 표방한 남성연대가 출범해 남성운동을 벌이고 있다. 남성연대는 공공시설의 남성 이용 배제는 성차별이라는 국가인권위의 결정을 근거로 최근 충북 제천의 여성전용도서관에 진입을 시도하다 도서관 측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올 5월에는 가수 백지영 신곡 '굿보이'가 남성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음원 유통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고, 올 초에는 출범 이후 남성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 적이 없는 여성가족부가 가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기만이라며 가족 명칭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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