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허풍담/ 요른 릴 지음/백선희 옮김/열린책들 펴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열대야라고 짜증 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웃통을 벗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선풍기를 틀고 잠들어서는 더더욱 안 되는 거였다. 하룻밤의 쾌적함의 대가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콧물이 줄줄 흐르고, 기침은 콜록콜록. 머리 속에는 묵직한 돌덩이가 들어앉았다.
짜증과 심통 난 얼굴로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북극허풍담'. 북극해의 차가운 바람에 맞서는 불굴의 사나이들,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질주하며 신천지를 찾는 용맹한 탐험가들과, 사나운 곰과 바다표범을 사냥하는 거친 사냥꾼들의 이야기 따윈 없다. 이건 그냥 빙산처럼 투박하고 못 말리는 괴짜 사냥꾼들의 '허세 작열' 시트콤이다.
일주일은 너끈히 수다를 떠는 궤변가와 지능지수가 의심스러운 멍청이, 먹고 자고 싸는 게 가장 큰 일과인 늙은 사냥꾼, 수탉을 동반자로 여기는 철학자에 바로 앞의 곰도 못 알아볼 정도로 지독한 근시인 곰 사냥꾼과 얼어붙은 땅에 농사를 짓고 포도주에 라벨을 붙이는 백작 등 온갖 잡다한 인간들이 모여 있다.
희한한 인간들인 만큼 온갖 기상천외한 소동이 벌어진다. 동료의 장례식에 모였다가 만취한 탓에 죽은 사람 대신 술 취한 동료를 관에 넣고 바다에 띄우기도 하고, 수송선에 실려온 쥐 한 마리를 얼어 죽이겠다며 빙하 위에서 며칠을 버틴다. 문신예술가에게 1년 동안 사냥한 모피를 모두 내줘 가며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사냥을 나갔다가 무너진 빙하에 실려 한 달이나 바다를 헤맨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바지를 홀딱 벗고 남동풍을 향해 달리거나, 함께 생활하던 동료를 돼지로 착각해 잡아먹기도 한다.
이들은 어느 곳에서보다 자유로운 공동체를 이룬다. 문명세계의 법이나 권위는 통하지 않는다. 유일한 법은 '따뜻한 인간애'다. 다른 동료를 만나려면 개썰매를 타고 사흘 넘게 달려야 하지만 결코 손님을 외면하는 법이 없다. 사냥을 못 한 사람이 굶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사냥 오두막을 이용하면 다음 사람을 위해 석탄을 채워두고 성냥을 준비한다. 곰 사냥을 못해 좌절한 신참을 위해 몰래 사냥을 돕는 고참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황량한 북극은 상상 속의 여인도 창조한다. 사과 도넛처럼 달콤하고 파란 하늘빛 눈과 빨간 입술을 가진 여인 엠마. 사내들은 가진 것을 탈탈 털어 엠마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사고판다. 그렇게 1년 넘게 머릿속을 떠돌던 엠마는 상상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한 사냥꾼 탓에 수송선을 타고 멀리 떠난다. 마지막에 돈을 번 건 엠마의 뱃삯을 받은 수송선 선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허풍과 소동의 연속이지만 허투루 넘길 책은 아니다. 교묘한 풍자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광활한 자연에 대한 경외심도 만만찮게 녹아 있다. 덴마크 출신으로 열아홉 살부터 16년 동안 그린란드 북동부에 살았던 저자의 체험에서 나온 힘이다. 10권짜리 시리즈지만 국내에는 3권까지 출간됐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지독했던 여름 감기가 북극으로 떠난 걸 깨달았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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