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이 많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마을은 도계(道界)인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官坪里, 상'중'하관평)의 이름을 따 아예 '관평(官坪)마을'로 불릴 만큼 주민들은 '이웃사촌'처럼 지내고 있다. 관평리는 이곳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괴산 관평리에는 68가구 144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데 비해 문경 완장리 관평마을은 15가구 32명에 불과하지만 갈등 없이 한마을처럼 오순도순 삶의 터전을 함께 일구고 있다.
가은읍 왕능리에서 문경탄광의 대명사였던 은성광업소 터를 지나 충청도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 저 멀리 대간의 산맥들이 보인다. 그 중심에 한국의 100대 명산인 대야산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대야산은 지도상 대부분 경상도가 차지하고 있다.
◆관평마을은 경상도와 충청도 인후(咽喉) 마을
관평마을은 양도의 점이지대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인후(咽喉)마을'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니 비유가 적절하다. 관평마을까지는 가은읍내에서 922번 지방도인 대야로를 따라 20㎞(50리)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청주까지 이어지는데, 중평에 이르면 중부고속도로를 만나고, 청주에 이르면 경부고속도로를 만날 수 있다. 가은 사람들이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서울 갈 때 이용하던 지름길이다.
가은읍에서 왕능리, 하괴리, 상괴리를 지나면 관평마을 가는 길 초입이 나온다. 완장1리다. 경상도 완장리와 2~3m 내외의 도랑을 경계로 왼쪽으로 가면 경상도, 오른쪽으로 가면 충청도 마을이다. 자그마한 시멘트 도랑다리가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셈이다.
문경 사람들은 이쪽 완장리 마을을 그냥 관평마을이라고 부른다. 행정적으로 선을 그은 것이지 사람들의 마음은 선이나 벽이 없다는 방증이다. 여기서는 말도 풍습도 경상도나 충청도나 비슷하다. 경상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충청도도 아닌 것이 경상도와 충청도의 교집합이다.
◆신선이 놀다간 곳 선유동 계곡은 괴산에도 문경에도 있다.
문경과 괴산의 경계선쯤에서 주민들에게 선유구곡을 물으면 '어느 선유동을 말하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도 선유동이 있고,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대야산 자락에도 선유동이 있기 때문이다. 선유동이란 신선(仙)이 노닐(遊)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두 곳의 선유동 바위에는 '선유동문'(仙遊洞門)이란 각자가 뚜렷하다. 선유동문이란 이른바 '선교'(仙敎)의 성지쯤으로 이해된다.
괴산과 문경의 두 선유동 사이의 거리는 10㎞ 안팎으로 가깝다. 괴산 쪽의 선유동에는 퇴계 이황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퇴계가 송면리 부근의 함평 이씨 집을 찾았다가 산세와 계곡의 절묘한 풍광에 빠져 무려 아홉 달을 머물면서 구곡을 정하고 이름을 지어 새겼다는 것. 문경의 선유동은 대야산 용추계곡 아래쪽에 펼쳐져 있다. 괴산의 선유동이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문경의 선유동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이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가까운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鳳巖寺 智證大師 碑文)도 남겼다. 계곡에는 부드럽게 깎인 커다란 암반과 집채만 한 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어 특급 피서지로 꼽힌다. 피서철에도 이곳 양쪽 마을은 바가지란 것이 없다. 민박요금은 3만~4만원 선. 텃밭에 심은 옥수수를 삶아 건네는 마을 사람들의 인정이 묻어난다.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관
문경 가은에서 관평리 가는 길인 완장리 초입에는 구한말 독립운동가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선생 기념관이 있다. 정3품의 높은 관직을 훌훌 던져버리고, 흰옷을 입고 분연히 스러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이다.
운강은 1858년 철종 9년에 완장1리에서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18세손으로 태어나, 22세 때인 1880년 무과에 소년등과를 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3년 이상 전국 각지를 돌며 게릴라전법으로 일본군을 쳐부수다가 1908년 6월 4일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돼 처형당했다.
서울 전쟁기념관에는 삼국시대 이후 6'25전까지 22명의 호국인물을 선정해 흉상을 세워 기리고 있는데, 운강 선생이 포함돼 있다.
운강 기념관 맞은편에는 '선유동천 나들길' 입구가 있다. 문경시가 최근에 조성한 길이다. 선유동 계곡을 따라 사람들이 자연과 가까이 다가가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선유구곡의 1곡부터 학천정 앞 9곡까지 이어진다.
◆이완용과 문경 학천정(鶴泉亭)
가은읍 완장리 선유동계곡 상류에는 조선 영조 때 학자로 우봉(牛峰) 이씨인 도암 이재(陶庵 李縡)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06년 세워진 학천정(鶴泉亭)이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있다.
도암은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한 노론(老論)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급제해 대제학'이조참판을 지냈다. 그런 그가 조정에서 중간 중간 물러나면 자신의 일가들이 세거하던 이곳으로 와 몇 개월씩을 보냈다고 한다.
학천(鶴泉)이라는 글자 옆에는 이 글자를 쓴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놀랍게도 '이완용'(李完用)이다. 이(李)는 선명한데, 완(完)자와 용(用)자가 희미하다.
이완용도 우봉 이씨다. 그가 한일강제병합 후 이곳에 왔는데, 당시 비판여론이 높아 아무도 그를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곳에 세거하던 우봉 이씨 집안 사람들조차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이완용은 혼자 쓸쓸히 자신의 선조인 도암 선생을 위해 지어놓은 학천정에서 이 글씨를 남기고 간 것이다.
이 마을에 살다가 시내로 집을 옮긴 우봉 이씨 이강홍(63) 씨는 "이완용 할아버지가 일본과의 강제병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지만, 제2대 독립협회 회장도 하시고 윤치영, 이승만, 서재필 선생 등과 독립운동도 하는 등 반일에 앞장서기도 했다"고 항변했다. 또 "이곳에 사는 우봉 이씨와 이완용 할아버지는 참판공파로 한 파이긴 하지만 가까운 친척은 없고, 가은읍 작천의 한 종문이 이완용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살림을 맡아 했는데, 귀향할 때 큰 재산을 받아 내려와 천석꾼이 되었다"며 "그런데 그 아들이 일본황실학교까지 졸업하고도 그 재산을 못 지키고, 말년에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생활하다 한생을 마감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금 아래 마을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강년이 태어났고, 이곳에서는 나라를 일본에 강제병합시키고, 일본의 귀족으로 천수를 다한 이완용이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강년과 이완용이 1858년 같은 해 태어났고, 이완용이 대구에 살다가 그의 집안 아저씨뻘 되는 이호준의 양자로 가 1882년에 문과 급제를 한 것 등은 1880년에 무과에 급제한 운강과 비슷한데, 왜 이 두 사람의 운명이 이다지도 어긋난 것일까.
◆관평마을과 관평리는 주소도 경계도 없는 마을
문경을 벗어나오면 첫 마을이 상관평, 관지골마을이다. 장성봉 남쪽 자락에 펼쳐진 아늑한 마을이다. 많은 집이 신식 집으로 잘 꾸며져 있다. 옥수수, 고추, 배추, 양배추 등 준고랭지 농작물이 작은 분지 속 들판에 출렁인다. 이 마을 끝 부분에 관평삼거리가 있다.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라고 1796년 4월 5일에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심고 가꾸어 왔다는 것이 비석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도랑 건너 괴산 관평리에 사는 민옥기(71'여) 씨는 문경 벌바우에서 시집을 와 여태까지 산다고 한다. "지금은 영감 할마이만 살구, 애들은 다 객지로 나갔우. 우리 친정이 벌바우 민씨네여. 우린 말도 이젠 경상도도 아니구 충청도도 아닌기 영 어정쩡해유. 저 건너 마실들이 경상도 땅이여. 경상도니 충청도니 뭐 할 게 있유? 우린 마실 회의하면 다 같이 모여유. 선거 때나 뭐 그럴 때 경상도 가구 충청도 가구 그러지. 상포계도 같이 허구. 큰일도 다 같이 보구. 다 한 마실로 살어유."
7남매는 모두 중관평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송면에 있는 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는 대부분 청주로 보낸다고 했다. 괴산이 거리상으로 가깝긴 해도 버스가 옛날에는 청천, 청주로 가는 게 많이 다녀 자연히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상관평에서 5리쯤 가면 중관평이 나온다. 관평리 마을 중에 중간에 있어 중심마을이기도 하다. 하관평에서는 문경에도 있는 선유동이 시작되고, 이곳부터는 점점 충청도로 깊어진다. 그 중간에 경상도 마을인 완장리 홍주막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문패 주소가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로 되어 있는 집이 있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집배원이 헷갈려서 그렇게 해놓았다고 했다. 주소도 경계가 없는 마을이다.
문경'고도현기자 dory@msnet.co.kr 고성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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