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사십 년 만의 귀향

영창에 비친 달이 오늘따라 유난히 환하다. 달 주위로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흐른다.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풍경화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 달도 나하고 눈맞춤을 하느라 움직임이 없다.

이 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노래처럼 부르고 주문처럼 되뇌어 왔다. 고향 근처의 산골에 새 둥지를 틀면서 마침내 그 바람을 이루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그새 어언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백석이 읊었던 절창이 지금의 내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해준다. 그렇다고 백석처럼 나도 세상이 더러워서 산골로 숨어든 것은 아니다. 그동안 세상과 씨름하느라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지나간 날들을 조용히 되돌아보며 후반전 인생을 의미 있게 가꾸어 갈 꿈을 꾸었다.

수필가 ㅎ씨의 글귀가 생각난다. 이른 나이에 저세상으로 떠난 오라버니의 죽음을 두고 장례미사 때 신부가 들려준 강론의 말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의 영혼은 너무 순수해서 이 세상에는 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영혼의 순수까지야 언감생심일 노릇이지만, 마구 정신을 휘둘리게 하는 도시의 복닥거림이 어쩐지 생리에 맞지 않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지난 사십 년은 끊임없이 도시와 헤어지는 연습을 해온 시간이었다. 누구는 도시의 활기 넘치는 역동성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시골은 고여 있는 물 같아서 도무지 사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고도 했다.

그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데서 나는 오히려 재미를 느낀다. 사람 대신 만나게 되는 무수한 생명체들, 그들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의 소중한 가치를 아프도록 일깨워준다. 그것은 회색빛 일색인 콘크리트 숲으로부터 벗어나 초록이 지천인 산과 들에서 풍겨오는 건강한 생명의 냄새를 원 없이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 어디라도 눈만 돌리면 풀과 나무들이 벌이는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그 광경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어느 하룬들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인한 정신의 시달림에서 자유로운 적이 있었던가. 순간순간 숨이 가빠오고 나날이 영혼은 황폐화해 갔었다.

산골 생활은 문명과의 거리두기다. 문명과 멀어질수록 영혼은 부쩍부쩍 자라나는 것을 실감한다. 사십 년 만의 귀향으로 나는 사람을 잃고 자연을 얻었다.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데가 어디 있으랴. 주판알을 튀겨 보니 그래도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만하면 나로선 수지맞는 장사였다.

곽흥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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