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진흙의 사람

◆진흙의 사람 - 나희덕

아일랜드에서는 이런 점을 친다지

접시에 반지, 기도서, 물, 진흙, 동전을 담아

눈을 가린 술래에게 하나를 집게 하는데

반지를 집으면 곧 결혼하게 되고

기도서를 집으면 수도원에 가게 되고

물을 집으면 오래 살게 되고

진흙을 집으면 곧 죽게 되고

동전을 집으면 엄청난 부자가 된다지

내가 집어든 것은 진흙,

차갑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손끝에 느껴질 때

그것이 죽음이 만져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놀라기도 하지

그러나 우리는 오래 전 진흙으로 빚어진 사람,

아침마다 세수하면서 그 감촉을 느끼곤 하지

물로 씻어낼 때마다 조금씩 닳아가는 진흙 마스크를

잘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를 시작하지

아일랜드에 가지 않아도

반지, 기도서, 물, 진흙, 동전을 담은 접시는

식탁이나 선반 위에 늘 놓여 있지

내가 집어든 것은 진흙,

그것으로 빚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고

진흙이 마르는 동안 갈라지는 슬픔 또한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눈 어두운 진흙의 사람,

그러니 내 손이 진흙을 집어들더라도

부디 놀라지 말기를!

가렸던 눈을 다시 뜬다 해도

나는 역시 한 줌의 진흙을 집어들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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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면서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상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문제를 새롭고도 깊이 있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시의 진정한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가장 상투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는 인간이 진흙으로 빚어진 유한한 존재라는, 너무나도 상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점술, 아침 세수 때마다 모른척하는 진흙 마스크 이야기로 이 문제는 마치 처음 보는 듯 새롭고도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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