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첫 장을 펼쳐보면 하나님의 소리가 빛을 불러내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 고향도 창세기의 태초처럼 어머니의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빛이 산천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빛은 고향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산 능선의 윤곽을 그려내고 강에 물을 흐르게 하며 이윽고 신작로와 고샅에 사람들을 웅성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나의 기억 속 고향에는 소리와 빛이 맞물려 있다. 고향에도 지문이 있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그 지문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밥'이라는 화두가 항상 함축되어 있다. 끼니때가 아니면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놀이에 한눈팔린 철없는 아들이 제시간에 집에 들어올 리가 없다. 밥솥에 불을 때다가 뜸 들일 시간이 되면 광목치마끈을 곧추 매면서 동리 어귀로 나와 고함을 지른다. "밥 묵구로 빨리 들어오너라." 딱지치기나 구슬치기가 끝이 나기 전에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기가 예사다. 그래서 고향의 여름은 소리로 깊어간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까닭은 허구한 날 마주하는 보리밥과 나물 반찬이 신물 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목소리만 듣고도 오늘 저녁 반찬이 '만날 먹는 그것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다. 그 목소리 속에 기쁨이 묻어 있으면 약간 특별한 반찬이 준비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한 단계 더 올라가 음색이 행복을 느낄 정도로 젖어 있으면 소고기 국을 끓였거나 갈치구이에 갖은 양념을 뿌려두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올여름이 너무 더워 밥맛이 뚝 떨어졌다. 열대야에 올림픽 방송까지 겹쳐 잠을 설쳤더니 먹새 좋은 입맛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찾아올 길이 막연했다. 이젠 어머니 대신 내가 나서서 나를 찾아와야 할 형편이다. 입맛을 회복하는 방법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 어린 날 여름 고향의 품에 안기는 수밖에 없다.
의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나의 '여름 향연'은 신나고 재미있다. 밥상을 옛날 그 시절의 것과 비슷하게 차려두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에게 "여름 한 철만 보리밥을 먹자"고 제의했다. 여름 밥상의 밥은 보리밥이어야지 쌀밥으로 바뀌면 주연 배우가 잘못 선정되어 연극을 망치는 것과 똑같다. 우리 집 식단은 보리밥에 걸맞은 된장찌개와 열무김치를 비롯한 푸성귀들뿐이다. 요즘은 밥상 앞에 앉으면 웃음이 난다. 밥 먹는 동안에 나는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가 되어 목덜미의 땀띠를 쥐어뜯는 시늉을 하며 투정도 부려본다. 사실 행복은 별 게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와인 한 잔, 밤 한 톨, 파도소리, 허름한 화덕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한 대목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 집은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이어서 줄지어 늘어선 옥상 화분들이 텃밭 구실을 한다. 고추, 가지, 파, 들깻잎, 방울토마토가 몇 포기씩 심어져 있어 두 식구가 먹고도 남는다. 아내는 갓 따 온 고추와 가지를 밥할 때 옛날 방식대로 쪄서 양념간장으로 무친다. 점심때는 스무 장씩 한 묶음으로 묶어 된장 속에 박아 둔 들깻잎을 찬물에 만 식은 밥에 얹어 먹는다. 마늘종도 봄에 된장에 박아 둔 걸 꺼내 썰지 않고 손에 쥐고 그냥 먹는다. 그 맛은 기가 차다.
들깻잎 순은 맛있는 멸치와 함께 조선간장을 붓고 졸이면 그것 하나만 해도 보리밥 한 그릇쯤은 후딱 해치운다. 한양에서 돌아온 이도령이 춘향이 집에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밥 한 그릇을 먹어 치우는 것과 같다. 우리 집 여름 반찬은 옛날 고향에서 어머니가 하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름 밥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 때마다 "야야, 밥 묵구로 빨리 들어오너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나이에도 나는 어머니가 그립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