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녹음과 골짜기를 울리는 물소리, 소름을 돋게 하는 더위 사냥의 장소가 있다. 바로 백운계곡이다. 지리산 백운계곡은 백두대간의 출발점인 경남 산청 지리산 웅석봉 서남쪽을 파고든 숨은 계곡이다. 왕복 8㎞로 골이 깊어 수량이 풍부하고 물은 덕천강으로 흘러든다. 계곡은 평이하고 위험 구간도 거의 없는 천혜의 명품 산행 코스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폭포와 소, 아름다운 반석, 기암괴석 사이로 미끄러지는 맑은 계류, 곳곳이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남명 조식 선생이 즐겨 찾던 곳이고, 경상우도의 석학 백운동 칠현이 자주 모여 용문암 개울 열여덟 굽이에 이름을 붙여 시를 짓던 유명한 계곡이다.
◆운리마을에서 출발
등산과 계곡트레킹을 병행하기 위해 지리산 둘레길 8코스를 찾았다. 시작점은 운리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시비와 단속사지 석탑(보물 72, 73호)을 둘러보고 산행을 시작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길 옆에는 감나무가 줄지어 있고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들녘에는 푸른 벼가 여물고 논두렁에 심어놓은 콩이 향수를 부른다. 한창 영글고 있는 밤도 머지않아 입을 벌리고 알밤을 토해낼 것이다. 아담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길은 임도로 이어진다. 수해로 망가진 임도를 최근 포장한 듯하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지루한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자니 금방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산 쪽으로 널따란 임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4각정자가 있다. 전망이 확 트이는 곳으로, 올라온 운리마을과 건너의 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휴식을 취하고 15분 후, 등산을 시작한 지 1시간여 만에 임도에서 왼쪽 산길로 올라붙는다.
땡볕을 피해 우거진 숲길을 편하게 걷다보니 곧이어 주능선이 나타나고 임도가 둘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 이정표가 나온다. 백운동 계곡으로 가는 둘레길과 선인봉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이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둘레길의 멋진 워킹 코스가 펼쳐진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고요를 깬다. 울창한 숲에 소나무와 참나무가 빽빽하다. 간벌을 해주면 나무가 굵고 곧게 자랄 텐데 공간이 좁으니 햇볕을 받으려 키는 멀대같이 크고 부실해 보인다. 그 중에도 힘센 나무는 제자리를 확실히 잡았다. 나무의 세계에도 생존경쟁이 치열함을 본다.
여기서 페이스에 따라 산행 코스를 선택한다. 적당한 등산에 백운계곡 트레킹이 목적이라면 흙으로 된 둘레길을 따르고, 선인봉(해발 809m)을 연계해 등산하려면 이정표 뒤편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을 택한다.
◆빼어난 계곡, 풍부한 수량
산 사면을 가로지른 등산로는 흙으로 된 넓은 임도와 만나 가파른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숨이 턱에 찬다. 안부(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를 만나면 오른쪽에 고령토 채취장이 보인다. 원래의 길은 채취장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다. 임도를 따라 150여m 진행하면 왼쪽 백운계곡으로 내려가는 소로와 오른쪽 채취장 쪽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보인다. 선인봉을 등산할 때 가장 주의해야할 지점으로 자칫 임도로 계속 진행해 버리면 선인봉을 오를 수 없다.
오름길은 '깔딱고개'다. 무더운 날씨라 몇 번이나 중도에 포기하고 싶을 정도다. 해발은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할 뿐, 둘레길 갈림길에서 선인봉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조망은 별로다. 정상 못미쳐 거대한 바위 하나가 있는 전망대바위가 유일하다. 오름길과 마찬가지로 정상에도 숲이 우거져 조망이 터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작은 바위 위에 누군가 돌탑 하나를 세워놓고, 참나무에 '선인봉 809m' 란 코팅한 종이를 묶어 놓았을 뿐이다. 하산 길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서너 개를 땀 흘리며 40분 정도를 오르내려야 겨우 갈림길이다. 갈림길에서 백운계곡 상류부까지는 10분 정도, 둘레길과 만나는 중간지점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콸콸' 우렁찬 물소리에 이끌려 계곡으로 내려선다. 계곡이 넓어 가슴이 확 트인다. 땀으로 젖은 몸을 차가운 물에 맡기니 산행 중에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어진다. 신선이 따로 없다. 빼어난 계곡미, 풍부한 수량, 마당처럼 널따란 암반을 타고 흐르는 계류, 그 옛날 남명 선생이 즐겨 찾았다는 이유를 알 듯하다. 남명 선생은 청정수에 발 담그고 물소리'바람소리'벌레소리를 벗삼아 글을 짓지 않았을까? 물 좋고 경치 좋아 나그네의 갈 길을 쉬이 내주지 않는다.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곳이다.
◆물 반, 사람 반
임도가 끝나는 곳에 둘레길 마근담에서 사리로 가는 길과 계곡으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있다. 마근담은 '막힌담'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골짜기 생김새가 마의 뿌리처럼 곧아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근담 사람들이 백운마을로 가던 마을길이다. 계곡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중간마다 첨벙거리며 물놀이를 하려니 내려갈수록 사람이 너무 많다. 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로 물 반, 사람 반이다. 계곡은 이어지고 백운산장과 작은 절 용문사를 지나면 백운리 정자나무 아래서 산행이 끝난다.
백운계곡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이자 영남사림의 거두였던 남명 선생의 체취가 지리산록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남명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남명 선생 장지소(南冥先生杖之所)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으며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 는 글을 지은 작품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명 선생은 두류산(현 지리산)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명망이 높았다. 여러 차례 임금이 벼슬을 내려 등용하려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옳은 일이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정신이 남명 설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 남명 설화는 세상 모든 권세 앞에 초연한 남명의 고고한 모습을 통해서 선비 정신의 참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소재 경상대와 남명학연구원 등에서 남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글'사진 양숙이(수필가) yanggibi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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