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한중 관계가 지금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데에는 1993년 6월부터 2년 6개월간 제2대 주중대사를 역임한 황병태 전 대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래선가 황 전 대사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려고 하자 당시 중국의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16명의 장관급 주요 인사들을 불러 직접 환송연을 베풀어주면서 "당신은 영원한 중국 대사"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대학 총장과 국회의원 등을 거친 그 역시 전 주중 대사로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탕자쉬안 전 국무위원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황 전 대사를 찾았다. 주한 중국대사와 공사 등 수행원들을 데리고 나온 그는 황 전 대사와 정식으로 인사를 하면서 "한중 간의 정치적 관계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특히 이때 탕 전 국무위원은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 출범에 맞춰 방한한 것이었는데 마침 이 사무국의 신봉길 초대 사무총장이 황 전 대사의 사위였다. 이 같은 사실은 황 전 대사와 중국과의 깊은 인연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근 낙마한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도 황 대사의 퇴임 환송연에 참석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황 전 대사는 어떻게 한중 관계의 틀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장 전 주석으로부터 '영원한 주중대사'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까.
그는 수교 당시 중국이 경제성장의 파트너 정도로 생각하던 관계를, 정치를 포함한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한중 관계로 전환할 수 있도록 방향을 틀었다. 주중 대사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중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 아래 '균형 외교'를 주장, 대미 일변도의 한국 외교 노선을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 개선 중심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균형 외교'는 격렬한 국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전방위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일개 대사가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수정을 주장하자 중국 측에서는 황 전 대사가 조만간 경질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우리 정부의 대중외교 노선이 보다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자 중국지도부는 황 전 대사의 정치적 위상을 신뢰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와 관련, 황 전 대사는 "모험을 해서 떠들었기 때문에 한중 관계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다"며 "6자회담이 열리게 된 것도 그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주중대사로 간 지 1년여 만에 장쩌민 전 주석 등 중국의 국빈급 인사들의 방한을 모두 성사시켰다.
그는 요즘 중국을 자주 방문하지 않는다. 갈 때마다 국빈급 대접을 하는 바람에 부담스럽고 중국 측 인사를 너무 번거롭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011년 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중국 외교부 측에서 황 전 대사가 대사 재임 시절 좋아했던 중국요리를 기억했다가 '압록강 개구리알' 등 12가지 메뉴를 준비, 한글로 메뉴판을 만들어 줬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선가 그는 "자주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황 전 대사는 수교 20주년을 맞은 올해 한중 관계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라고 강조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전대미문의 찬스라고도 할 수 있다. 한중 관계의 1단계가 수교였고 2단계가 전면적인 동반협력자 관계였다면 3단계는 남북통일을 할 수 있도록 중국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는 북한의 관심과 에너지를 개혁개방에 몰두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마침 김정은 체제로 바뀐 북한도 개혁개방과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개방되고 개발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남북통일의 지름길이라는 설명이다. 대중외교의 초점을 그쪽으로 맞춰야 한다고 황 전 대사는 거듭 강조했다.
지금 현재 북핵문제를 건드리지 말고 중국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북한이 압록강 황금평과 위화도 개발을 하는 등 개방의 길을 선택하면 우리도 개성공단을 보다 확대해서 황해도 등지에서 경제협력을 확대하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은 체제의 개혁개방 움직임을 중국이 지원하는 것이 대중외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북활동가인 김영환 씨의 고문 문제 등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것을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소탐대실"이라면서 "북한의 탈북자 문제를 자꾸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개방지대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도 지적했다.
그는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졌을 때 중국과 긴밀하게 연락했다면 지금과 같은 남북관계와 중국의 역할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황 전 대사는 그때 한 방송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자 "천안함 사건이 터진 즉시 중국 측에 연락했어야 했다. 그리고는 6자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공동조사하자고 하면 사태가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우리 정부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에 먼저 통보,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상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등 우리가 미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중국이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북한과 다시 가까워진 계기가 천안함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 중국은 우리를 미국의 들러리로 재평가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주중대사로 일하면서 한중 산업협력을 추진, 한국과 중국이 전자, 통신, 비행기, 원자력 등 4가지 산업에 있어서 공동으로 연구하고 개발, 생산해서 판매하는 등 2인 3각 체제를 하자고 제안, 합의했다. 그러나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이 같은 방안에 대해 처음에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경제부처를 설득하고 중국 측 장관급들을 여러 차례 만나 한중간 산업협력에 합의했지만 결국 실질적인 결과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는 제대로만 됐다면 유럽의 에어버스 컨소시엄보다 더 나은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착상태의 남북관계에 대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문제보다 더 급한 것이 북한의 관심을 바꾸는 것"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서 중국이 북한이 개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우리도 개성공단을 확대하거나 황해도 등에서 경제협력을 확대할 때 남북 간에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중국과 큰 인연이 없던 황 전 대사가 주중 대사로 부임하게 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이었던 점이 한몫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총장을 하다가 1988년 정치권에 새 바람을 불어넣어 줄 '외부인사 영입 케이스'로 통일민주당에 부총재로 들어갔고, 그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당선돼 정치인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그 후 14대 총선에 낙선했지만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는 YS정부의 초대 주중대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요즘 그는 '자본주의 경제학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다. 자폐증에 걸려서 현실에서는 손을 못 쓰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진단이다. 팔순이 가까워오는 나이(1935년생)이지만 그는 9월 말쯤 출간될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생각해 온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황 전 대사는 "국내 출간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독자에게도 알리고 싶다"며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바빠질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후배 외교관 양성을 위한 전문서적 출간을 위한 외교부의 '오랄 히스토리'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외교관이 주재국에서 해야 하는, 이를테면 외교관 양성에 반드시 필요한 책인데 중국대사 출신을 대표해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와 공노명 전 장관 등은 각각 미국과 러시아에서의 외교적 실무를 조언했다.
황 전 대사는 새누리당 전략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재선의 조원진 의원과 사제지간인데다 정치적으로도 사제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가 국회의원 시절, 조 의원이 비서와 보좌관으로 보좌했고 주중 대사로 부임하자 조 의원이 대우그룹의 중국 주재관으로 가서 관계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조 의원은 "순발력이 뛰어난, 타고난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웬만한 사람은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년시절 고향인 경북 예천을 떠나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를 나와 고시를 통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외무부에서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상무부를 거쳐 경제기획원 국장으로 끝났고 이어 유학과 교수에 이어 대학총장으로 편안하게(?) 살던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자꾸 옮겨서 살아왔는데 후회는 없다"며 "스스로 생각해보면 욕구불만이 많았다고 할 수 있는데 역마살이 낀 것"이라고 자평했다.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