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도로시는 자신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오버 더 레인보우'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저기 어딘가 무지개 너머에 당신이 꿈꾸어왔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
구미에 살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부르면 가끔 생각나는 사람, 그녀와는 지나온 발자취가 비슷했기에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삶, 불안정한 현재, 불확실한 미래 등. 그녀와 만나서 하는 이야기란 주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무지개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언어로 이야기하던 그녀는 툇마루에 살짝 걸터앉아서 처마 끝을 쳐다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민들레씨앗다발 같던 그녀는 몇 년 후 서울로 이사를 했고 그 후에는 정말 선녀처럼, 나무꾼(?) 남편을 구미에 홀로 남겨둔 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녀가 있던 사택은 한때 가족들이 빼곡히 들어와 살던 곳이었습니다. 놀이터에는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어린이날이면 온 가족이 밖으로 나와 고기를 구워먹고 어울리며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족들은 하나 둘 기러기가 되어갔습니다. 밤이면 몇 안 되는 불 켜진 집들 사이로 홀로 남겨진 남편들이 유령처럼 걸어 들어갔습니다. 남편들은 가족의 흔적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아침이면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살다보면 인생의 기로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 서있듯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고심을 다해봅니다. 살아온 삶의 깊이와 넓이로 최선의 방향을 택해보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 길이었는지는 밖으로 나와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구미에서 살기로 한 것도 그렇습니다.
학위 과정을 마치기 위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가족이 헤어져 살기로 했을 때 한국으로 먼저 돌아간 남편이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엉엉 울지 않았더라면, 주말에 가족들이 나들이 나온 모습을 보고 울적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를 끼고 아늑하게 들어선 동네, 근처의 숲 속을 산책하며 느꼈던 여유로움과 고즈넉함, 활기 넘치는 상가의 모습 등, 유학을 떠나기 전 잠시 거쳐 가듯 살았던 구미에서의 좋은 기억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가족이 흩어져 살면서까지 하여 얻으려하는 것들이 잃어버리는 것보다 결코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또 아이는 아주 금방 자라고 아이가 부모를 가장 많이 찾는 시기에 부모가 함께 있어주는 것이 아이한테는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평생 힘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남편의 직장이 있는 구미에서 가족이 함께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20년 전, 고학력 여성과학자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근의 대학에서 자리를 얻고자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끔씩 구미에서 살기로 한 것에 대한 후회가 머리를 들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비로소 구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갓 지은 밥이 있다며 먹으러 오라던 아이 친구의 엄마, 잘 익은 총각김치 한 개를 올린 따뜻한 밥 한술을 입 안으로 넣었을 때의 느낌은 밥술만큼이나 따뜻했습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사람 사는 정을 나누는 그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크게 웃었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이 겉으로 보기에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행복보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미에서 평범한 주부로 지내며 인생의 다른 면들을 경험하는 동안 삶은 전보다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서서히 구미에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정답을 고르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삶을 선택하든 그것에서 최선의 것들을 찾아내는 데에 있는 듯싶습니다. 삶은 결국 결과이기 보다는 과정이니까요.
구미에 살아도 괜찮습니다.
백옥경/구미과학관장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