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한 예언서다. 조선왕조가 곧 망하니 살아남으려거든 복된 피난처로 가고, 정씨 진인(眞人) 이른바 정도령이 와서 새 왕조를 연다는 것이 예언의 골자다. 지배층에겐 정감록이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이었겠지만 민중들에겐 위로와 희망의 복음으로 비공식 베스트셀러였다.
피폐한 삶과 신분의 덫에 갇혔던 민중들은 부패한 기성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할 구세주로 진인 정도령을 갈망했던 것이다. 정도령은 이상적인 군왕의 상징으로 설정됐다.
21세기에 사는 요즘 우리 국민들도 예언서에 나왔듯 정도령 같은 진인의 출현을 고대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사회 양극화와 빈부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8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줄어들 줄 모르고 있다. 희망과 도전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어야 할 청년층은 일자리가 없어 대학 졸업을 꺼리고, 직장에서 퇴출된 이들은 자영업에 손을 대지만 열에 아홉 사람은 실패하고 만다.
이러니 국민들이 진인 같은 완벽한 지도자는 아니더라도 작금의 현실을 초래했거나, 변화시키지 못하는 지도자와는 다른 모습의 리더 출현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국민들의 이런 심중은 어느 정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 출마 선언도 하지 않고, 소속 정당이 없는데도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해준다.
우리 국민들은 제16대 대선 때 지지율에서 압도적으로 앞섰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대신 막판에 극적으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선택했다. 노무현은 당초 지지율이 5% 안팎에 머물렀지만 드라마틱한 경선 과정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또 다른 유력 주자와의 후보 단일화로 단숨에 이회창 후보와 대등한 수준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내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소탈한 모습에, 또 뭔가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에 국민은 노무현을 선택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국민의 마음이 급변한 것이다.
그러나 어땠나. 과거의 잘못된 역사는 분명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사회 갈등과 계층 대립은 더 심해졌다. 또 기득권 세력은 '악'이요,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가 기득권층 때문에 비롯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와 개혁 세력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돼야 한다는 선민 의식(?)으로 뭉친 집권 세력의 어설픈 개혁 작업으로 나라가 5년 내내 홍역을 앓았다.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가. 이명박은 우리 정치 구조상 있기 어려운 500만 표 차로 당선됐다.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대기업 사장에까지 오른 이명박에게 우리 국민은 적어도 일자리 창출과 경제 문제만은 확실히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사회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서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이명박은 노무현식 개혁과 리더십에 대한 반작용이었지 우리 국민들은 실제 그의 가치관과 진면목을 보고 판단하지 않은 탓이다.
국민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불과 4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제18대 대선 길목에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안 교수는 각종 강연과 저서를 통해 자신의 경제관을 피력하고 있다. 실업 문제는 청년 고용률을 높이고 고령화 사회를 대비해 정년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없다. 안 교수가 운영하는 '안랩'에서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일자리 창출에선 중견기업을 더 키워 고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무슨 재원으로, 대기업과는 어떤 관계 맺음으로 할 것인가.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개인이든 조직이든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려면 냉엄한 현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선의를 앞세워 어쭙잖은 고담준론이나 늘어놓는 이상주의자와 현실을 다뤄야 하는 정치 리더는 구분돼야 한다. 안 교수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경우 결국 야권과 함께하는, 심하게는 야권에 업힌 정권이다. 현 야권과 안 교수의 가치관은 일치하는가? 또 다른 '국가 실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차라리 현실은 냉정하게 볼 수도 있는 문재인, 김두관, 손학규 등 차선의 후보도 국민의 관심권에 넣어보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결과는 국민들의 불행과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도령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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