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동무와 연인 / 김영민/ 한겨레출판

철학자 김영민이 들려주는 세기의 반려, 동무 혹은 연인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참된 길동무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우자나 벗, 혹은 스승일 수도 있을, 그가 있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덜 고적할 것이다. 철학자 김영민은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는 부제의 책 '동무와 연인'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동무 혹은 연인을 소개한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100번 달군 금침 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이것을 가지고 뾰족뾰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그 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의 글 '나를 알아주는 벗'의 일부이다. 이덕무는 초정 박제가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아웃사이더 지식인들을 동무로 삼았다. 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은 서얼 출신이라는, 당대에는 치명적이었던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동무로서의 상호인정과 우의가 더욱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책으로 병풍과 이불을 삼았던 이덕무와 '북학의'의 저자이며, '사치하도록 물자가 융통해야 나라가 산다'는 통상론부터 중국어 공용론을 주장할 만큼 급진적 북학론자였던 박제가. 대조적인 기질과 성향 탓에 동학이자 지기의 인연을 나누면서도 자잘한 긴장과 마찰이 잦았다는 그들의 우정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빛난다.

저자는 '동무'란, 대의라는 푯대 아래 모여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동지'나 사적 우연성으로 뭉친 친구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동무는 동무(同無)이며,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함께 걷는 사이라는 것. '길 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란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저술한 유대인 정치철학자가 나치에 협력한 자와 50년 동안 연인의 관계를 유지했다? 한나 아렌트는 대학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열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를 사랑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의 저자로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였으나, 나치 정권에 협력한 까닭에 전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한 인물이다.

"말은 워낙 사랑의 구성 성분이고 그 내력에서 뺄 수 없는 동반자이지만, 살의 매력이 드센 연애의 초기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에서는 말을 매개로 삼아 살 이후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긴요하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말을 가운데에 두는 '지적 반려'가 그 관계의 알속이었다."

육신의 매력은 곧 소멸하지만, 말과 생각을 나누는 관계는 영속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유론'과 '공리주의'의 저자인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심각한 우울과 인생의 회의에 젖어 있던 20대에 친구의 부인인 해리엇 테일러를 만났다. 21년간의 순수한 지적 교류가 시작되었고, 그녀 남편의 사후에야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들의 평등한 동반자적 관계는 해리엇의 권리를 철저히 보장해 놓은 결혼계약서와 페미니즘의 계보에서 획기적 저작으로 꼽히는 밀의 저작 '여성의 복속'에서 잘 드러난다. 밀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지적'도덕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것을 주었던 인물로서 주저함 없이 테일러 부인을 꼽는다.

저자는 근기와 재기마저 갉아먹는 사랑의 열정, 허영과 탐욕의 늪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랑이 아닌, 창조적 열정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로서 생산적 상호 인정에 근거한 연인 간의 사랑을 예찬한다. 친구도 애인도 없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 프로이트의 넘치는 호의 속에서도 다른 길을 걸어간 융 같은 어긋나는 관계들도 소개된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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