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칼자루는 중국이 쥐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1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중국 옌볜서 백두산 관광객을 태우고 가던 버스가 갑자기 길가에 멈춰 섰다. 가로수 그늘에 좌판을 깔아둔 개구리참외 장수를 본 한국인 관광객들이 '옛날 우리 토종 참외다!'며 차를 세워서다. 10위안짜리 한 장을 냈는데 굵은 참외를 20개도 넘게 담아줬다. 20여 명이 둘러서서 참외를 깎아 먹으며 잠시 8월의 무더위를 식혔다. 그때 한 관광객이 100달러짜리 6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빳빳한 지폐를 부채처럼 펼쳐 쥐고는 '아~ 덥다'며 흔들어 댔다.

그날 가이드는 안(安)씨 성을 가진 조선족,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또록또록한 아가씨였다. 남루한 시골 중국 참외 장수를 업신여기는 듯한 '돈 시위'에 순간 그녀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걸 보았다. 당장 한마디 쏘아붙일 것 같아 보였다. 시비라도 나면 여행단 분위기 망친다 싶어 얼른 다가갔다.

"안 양! 한국 졸부들 가끔 저러는 사람들 있어. 나도 저런 꼴 보기 싫지만 두고 봐, 5년 내로 한국 안 망하는가. 10년만 지나면 중국에 손 벌리는 날 올 거야."

가이드 아가씨 기분 다치지 말라고 건넨 필자의 말이 씨가 됐을 리야 없지만 그날 이후 4년 만에 IMF 사태가 터졌고 이제는 중국이 물건 안 사주면 밥 굶게 될 처지가 돼 버렸다. 그때 길거리에서 참외 팔던 옌볜 농부는 어쩌면 그 사이 서울 명동 쇼핑가게에 관광 왔다가 '여기서 여기까지 몽땅 얼마?' 하며 통 큰 '싹쓸이 쇼핑'을 하고 갔을는지도 모른다.

사흘 전 24일은 중국과의 수교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단돈 천 원에 개구리참외 20개를 집어주던 중국의 외화 보유고는 지금 3조 달러(3천 600조 원)다.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삼성의 경우 카세트 따위나 팔며 시작한 지 20년 사이 중국 내수시장 매출이 5천 배 성장했다. 중국 땅에 쫙 깔려 있는 삼성맨들만 10만 2천여 명. 삼성그룹 전 세계 인력(33만 명)의 3분의 1이 중국 땅에서 움직인다.

LG, 현대차, SK도 사정은 비슷비슷하다. 앞으로 쓰촨 성이나 산시 성 등 서부 지역 개발이 지속되면 대중국 경제 의존도는 급격히 더 심화된다고 봐야 한다. 과거 미국이 재채기하면 우리는 감기 든다던 경제 구도가 불과 단 20년 사이 베이징의 코끝만 간질거려도 서울은 폐렴이 올 정도로 뒤바뀐 것이다. 천하의 삼성, LG도 중국이 '나가라' 한마디면 바로 쪽박 신세다.

칼자루 쥔 그들이 금고 안에 챙겨둔 3조 달러의 위력은 더 가공할 만하다. 그들 지갑의 6분의 1만 열어도 미국 맨해튼과 워싱턴 DC의 부동산을 몽땅 다 살 수 있고 미국의 논밭 농경지를 몽땅 다 사도 1조 달러가 남는다. 후진타오가 몽땅 사서 한 해 농사 안 짓고 폐농시켜 버리면 1억 3천만 미국인의 양식이 떨어질 판이다. 내로라하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IBM 다 사버려도 달러는 철철 넘친다. 박지성, 기성용이 뛰는 프로축구단, LA다저스 야구단 등 세계적인 스포츠단을 몽땅 사서 후진타오가 구단주가 돼도 2조 하고도 수천억 달러가 남아돈다.

안 팔아서 그렇지 우리 제주도가 중국인 손에 넘어가는 것쯤은 손바닥 뒤집기다. 헛소리가 아니다. 벌써 제주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차이나타운(중국 투자) 건설 계획이 진행 중이다. 그뿐 아니다. 항공모함이 뜨고, 유인 우주선이 날고, 대륙 간 핵탄두 미사일은 군사 지하 기지에 차고 넘친다. 오늘의 중국은 이미 화살 한 방으로 물리치던 안시성 전투 시절의 중국이 아닌 것이다. 그런 가운데 김영환 고문 사건, 이어도 분쟁, 탈북자 북송 문제 등 외교'안보의 난제는 계속 쌓이고 터진다. 앞으로 또 어떻게 어떤 분쟁거리들이 나타나고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6만 명씩의 차세대 유학생들이 서로 오가고 있지만 이슈 하나 터지면 즉각 15억 명 대 5천만 명의 네티즌들이 각(角)을 세우는 미완성의 수교(修交)인 셈이다.

교만한 '달러 부채' 같은 건 더 이상 흔들어 보지도 못하게 된 약체 경제력과 군사력 열세 속에 우리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국력에서 을(乙) 처지가 됐다고 미래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다. 버려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더 깊은 지혜를 모으고 이기적 분열 대신 국력 대단합을 꾀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작 경선 하나도 매끄럽게 못 치르는 대선 주자들의 거시적 중국관(觀)은 보이질 않는다. 그게 중국 달러보다 더 큰 문제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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