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은 대마도에서 3개월을 머문다. 사명 일행이 '대마개유서'(對馬開諭書)란 예조참의의 서계를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전달한다. 이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대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한 뒤였다. 소는 이를 교토에 있는 도쿠가와에게 보내 사명과의 화친 회담을 위해 본토 입도 허락을 받는다. 이 과정이 3개월 걸린다. 사명은 8월에 대마도로 왔으나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되도록 교토에 있는 막부에서는 연락이 없어 앞일을 알 수 없는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더구나 사명은 이때 심한 치통을 앓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마 객관에서 왼쪽 둘째 치아가 무단히 아파 베개에 엎드려 신음'(在馬島客館左車第二牙無故酸痛伏枕呻吟)의 시에는 "머리 깎고 중이 되어서 항상 진리의 길에 있었고 수염을 남긴 것은 속세를 닮았건만 또한 집이 없네"라고 심정을 읊었다. 대마도에서 그는 여러 시'문을 남긴다. 이들 시에는 자신이 처한 사정과 답답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허송세월만은 아니었다. 박덕규의 역사소설 '사명대사 일본탐정기'에는 대마도로 끌려와 왜장의 처가 된 옹주(翁主)가 사명이 머물고 있는 '세이산지'에 월담을 하고 들어와 포로들의 실상을 고하는 내용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인 포로들의 애환을 보고 듣게 되는 것이다. 교토에서 열린 막부와의 강화회담에서 포로 송환을 강하게 요구해 이를 관철시키는 성과를 낸다.
◆사명, 드디어 교토로 향하다.
사명은 11월 하순 대마도주 소의 인도를 받아 교토로 향한다. 시모노세키(下關)를 지나 오사카(大板)에 이르는 항로를 택한다, 육로보다 해로를 택한 것은 당시 도쿠가와가 권력을 잡았지만 지방 벌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육로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명이 개척한 이 항로는 그 후 조선통신사 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사명을 따라 대마도를 출발, 오키섬을 지나 시모노세키로 향한다. 사명은 해로를 통해 1개월 만에 교토에 입성한다. 사명은 교토 가는 뱃길 와중에 도요토미가 왜병 본진을 이끌고 출전한 명호옥(名護屋)으로 배의 기수를 돌리게 해 도요토미를 미친놈이라고 실컷 욕을 한다. 또한 막부와 담판을 앞두고 자신감이 넘치는 표현을 거침없이 했다. 아울러 험난한 여정에 여러 가지 근심과 하루빨리 고국 땅을 밟을 날을 기다리는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시를 남겼다.
사명이 일본 세토내해(瀨戶內海)를 따라 오사카로 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뱃길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사명이 남긴 시문의 지명 등에 의존해 되짚어 볼 뿐이다. 사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아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마모토의 혼묘지(本妙寺)로 발길을 돌렸다.
◆횬묘지에는 사명의 유묵 남아
혼묘지는 구마모토 시내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8월 말 일본의 낮 수온주가 35℃를 넘는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왜병의 선봉장이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인연이 깊은 절이다. 혼묘지에 화재가 나 현재의 사찰을 가토의 무덤 위에 세웠다는 이곳 스님의 말이다. 이 절의 초대 주지는 닛신(日眞) 스님이다. 닛신은 임란 중에 울산 서생포 왜성에서 사명과 가토가 회담을 가질 때 그 자리에 배석해 사명의 높은 덕망을 알았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나중에 탐적사로 사명이 교토에 머물 때도 사명을 가까이서 모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혼묘지에 들어 자리를 잡자 시원스레 소나기가 내린다. 번개에 천둥까지 친다. 주지는 이곳에는 사명이 서생포 회담에서 닛신 스님에게 써준 북해송운법어(北海松雲法語), 북해송운일진사(北海松雲日眞辭) 등 4점의 유묵이 있다고 한다. 보관상태가 양호하다. 내용은 어렴풋하게 알 뿐이지만 400년 전에 쓰인 사명의 유묵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뭉클하다. 사명은 이곳 혼묘지에는 다녀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도 불제자로서 교류가 이어져 이곳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사명은 교토 혼포지(本法寺)에 머물 때 이곳 주지인 닛신의 청으로 '정지원'(淨地院)이란 글자와 '발성산'(發星山)이란 편액을 써 주었다고 국내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발성산 편액은 임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포로로 끌려간 홍호연(洪浩然'1582~1657)의 작품으로 확인됐고 '정지원'이란 사당 글씨가 있지만 원래 혼묘지가 불이 나 지금 글씨는 후대의 일본인이 쓴 글씨라는 알려진 것과 다소 동떨어진 말을 한다.
더구나 가토 탄생 450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념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한쪽에 사명의 유묵이 전리품처럼 걸려 있어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아니 아직도 가토를 꾸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명의 유품이 정작 자리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조선 백성에겐 원수였던 침략자 가토 가문이 보관하고 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케 됐다.
◆이순신의 친필과 임해군의 한시(漢詩)도 전해
그런데 이곳에서 뜻밖에 성웅 이순신 장군의 친필을 접하고 감격한다.
만리강산필하성(萬里江山筆下成)/ 공림적적조무성(空林寂寂鳥無聲)/ 도화의구년년재(桃花依舊年年在)/ 운불행녕초자애(雲不行寧草自愛). 글 말미에 '舜臣'이라고 적혀 있다. 봄의 싱그럽고 온화한 풍경을 그린 그림을 칭찬하는 칠언절구다. 필적이 당당하면서 탄력성 있고 부드러워 무장(武將)이었던 이순신보다 높은 교양과 어진 인품을 나타내는 작품이라는 평이다. 여기에는 가토에게 포로로 잡힌 임해군의 오언절구 한시와 조선국예조사서한(朝鮮國禮曹司書翰) 등도 보관돼 있다.
더구나 혼묘지의 3대 주지인 일요(日謠'한국명 余大男) 스님이 조선인이라는 것이 이채롭다. 그는 하동 사람으로 임란 발생 이듬해인 1593년, 13세의 나이에 가토군(軍)에 잡혔으나 그의 총명함을 탐낸 가토가 데려왔다고 한다. 이곳으로 끌려온 그는 학문과 수행에 정진하여 명승(名僧)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명대사의 행적을 담은 책 발간도 추진돼
혼묘지에서 사명의 유품에 대한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케가미(池上正示) 주지 스님이 일본의 한 사찰에서 사명대사 관련 책 발간을 진행하고 있다는 귀띔이다. 서둘러 후쿠오카에 있는 쇼코지(正行寺)로 향한다. 차로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하자 주지 스님 등이 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쇼코지는 사명과 깊은 인연이 있는 밀양 표충사와 양산 통도사 등과 이미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쇼코지 주지는 "사명대사는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대사는 유교를 비롯한 학문적 성취가 뛰어나고 불교적 학덕이 높아서 일본 막부와 회담을 통해 동북아 300년 평화를 이룬 성인"이라며 "이를 재조명해 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고 책 발간 이유를 밝혔다. 책에서는 사명대사를 유교와 불법을 겸비한 일본과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로 평가하면서 한일 우호의 가교 역할을 한 선구자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또 실제로 사명의 일본에서의 활약 이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오가면서 문물을 전수하고 한'일 간 긴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현재 책은 마지막 교정을 끝낸 상태로 조만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특히 이 절은 표충사에 있는 사명대사 영정을 비슷한 크기로 복제'기증받아 사명의 기일(忌日)인 8월 26일에 맞춰 영정을 내걸고 사명을 추모하는 아악 공연을 열고 있다. 여기다 절에서는 퇴계학을 연구하는 학회를 열고 연구소까지 두고 있었다. 최근에는 사찰 별원에 퇴계 선생 현창비를 세웠다. 비석으로 쓰인 돌은 한국에서 퇴계 후손이 가져온 것이라 한다. 더구나 양산 통도사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 9과를 분과받아 통도사 금강계단을 십분의 일로 축소한 똑같은 모양의 계단을 조성해 놓는 등 한국과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퇴계학 연구자 여신호(余信鎬'구유미대학) 박사는 "사명당은 지략과 담력'덕망을 고루 갖춘 분이다"며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 등 지금처럼 미묘한 한일 관계에 사명 같은 분이 계신다면 이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명이 그리워지는 이유다"고 말했다.
일본 구마모토에서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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