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문화적 평등을 실현하는 '뉴 파리'

예술의 도시 파리가 '뉴 파리' 정책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요지는 21세기 새로운 예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도시로 바꿔 나아가 이 시대의 진정한 문화적 도시로 기능하고자 함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과거의 예술 개념과 이별을 고해야 한다. 과거의 예술은 너무나 신성하여, 사방이 닫힌 화이트 큐브에 엄숙히 모셔져 관람객들은 그저 조용히 작품만을 감상해야 했다. 이 예술은 소위 위대한 예술, 엘리트 예술, 고급 예술로 대접받았으며, 서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이런 예술을 대중과 친근한 예술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가 '뉴 파리'이다.

그런데 사실 현대미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고, 사회가 미처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면이 있다. 21세기 새로운 예술의 패러다임에 따라 창작과 감상의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 이 변화를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하자면 사회적 평등을 위해 문화적 평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정신적 개화가 있었기에 도시 전체에 대한 수정 작업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결국 '뉴 파리'는 사회적, 문화적 평등의 실현을 위해 예술의 하드웨어를 과감히 뜯어고치는 실천 운동이다.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은 심화된 경제적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불가능했으며 산업화는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해체시키고 더욱더 고통스러운 경제적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냈으며, 경제적 평등이 달성된 이후에야 정치적 평등이 가능한 것을 확인했다. 이에 마르크스는 경제적 평등이야말로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사회 복지 정책이 도입된다. 그런데 또다시 사회적 평등 없는 경제적 평등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사회적 평등이란 정신적, 문화적 평등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이러한 점에서 파리는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리는 지금 변하고 있다. '뉴 파리'를 통하여 기존의 박물관, 미술관이 대중 친화적인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문화예술을 위한 일체의 하드웨어를 대중 중심적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올 4월에 재개관한 팔레 드 도쿄는 '새로운 도시' 프로젝트의 대명사이다. 100여 년 전에 지어져 얼마 전까지 사진과 필름 아카이빙을 위한 전시장으로 사용되던 7천 평 정도의 공간을 연 30~40회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시도들을 전시하는 세계 제일 규모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소수의 전문가만을 위한 공간에서 다양한 예술적 소통이 가능한, 누구나 휴식을 취하고 사색할 수 있는 장소로 변신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미술관 중앙 홀에 벽화가 그려진 롤러스케이트 슬러프를 설치해 관람객 누구라도 롤러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다. 진정 대중들의 쉼터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친다. 건물 옆 작은 정원을 16등분해 지역 주민들이 각자의 개성으로 가꾸는 정원 프로젝트도 운영 중이다. 이제 파리의 구석구석 전시 공간들이 즐비하게 들어찼다. 이민자와 유색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파리 동쪽과 북쪽 지역에도 매력적이고 차별화된 전시관들이 속속 들어서 예술로부터 소외된 지역이 거의 사라졌다. 그중엔 밤 10시까지 운영하며 생활 속의 예술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명상, 휴식, 사색, 독서, 운동 등 모든 비예술을 예술과 버무리며 지루한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보다 더 인간적인 세상을 권한다. 루브르 박물관 역시 '모든 대중을 위해 루브르는 존재한다'는 소명하에 퐈씨 감옥 앞마당의 회색 콘크리트벽에 10점의 루브르 소장품들을 그대로 복제해 진본과 다름없는 명화들을 전시하였다.

문화적 평등과 대중을 위한 예술을 실천하고자 하는 '뉴 파리'는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분명 현대인의 삶 속에서 생의 여유로움과 풍부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신적 하모니와 평안함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주의'로서,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가 아닌가.

이수균/대구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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