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활 타오르는 불의 시작은 작은 불씨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성냥이 그 불씨를 피우는 역할을 했다. 불을 동력으로 삼았던 지난 산업화시기를 뒷받침했다. 또 어둡고, 가난하고, 고단했던 우리네 일상 구석구석에 값싸게 빛과 온기를 선물해 준 생필품이었다. 때로는 장난감이 돼 재미를 선사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공적은 잊힌 채 이제 성냥은 추억이 돼 가고 있다.
◆우리나라 마지막 남은 성냥 공장
우리나라 성냥산업은 개항기인 1880년대 인천에서 시작됐다.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전국적으로 300여 개 공장에서 성냥을 생산했다. 그러다 값싼 중국산 성냥이 등장하고, 라이터가 보급되며 성냥산업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결국 성냥공장은 우리나라에 단 한 곳만 남았다. 경북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공업사'다.
성광성냥공업사가 문을 연 1954년은 6'25전쟁 이후 국토 재건과 산업화의 불씨를 지피던 시기였다. 성냥은 만들어내기 바쁘게 팔렸다. 공장도 함께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종업원 수가 최대 162명에까지 달했다.
당시 성광에서 만든 성냥은 좋은 품질로 인기를 끌었다. "내륙에서 생산된 성광성냥은 오히려 바닷가에서 인기를 끌었어요. 습기에 강해 뱃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배에서 담배를 태울 때, 시동을 걸기 위해 배 엔진을 달굴 때 등 두루두루 성광성냥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바닷가인데다 지하에 있어 습기가 심한 다방에서는 오로지 성광성냥만 고집했어요."
공장 창립 때 종업원으로 입사해 현재 대표로 있는 손진국(76) 씨. 그는 "성냥은 약품 10여 가지를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인 기술 집약적 제품"이라며 "당시 큰 트럭에 성냥을 가득 싣고 충무'통영'부산 등 남해안과 영덕'울진'속초 등 동해안으로 팔러 다녔다"고 말했다.
바닷가에서 성광성냥이 잘 팔린 이유는 또 있다. 당시 성냥갑에 새겨진 오리 상표 덕분이었다. "물에 빠지지 않는 오리처럼 배도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며 뱃사람들이 오리 상표에 의미를 부여한 것. 물론 성냥의 품질이 좋았기 때문에 오리 상표도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도 성광성냥은 빛나는 아이디어로 인기를 끌었다. "호롱불을 켜려고 해도 어두컴컴해서 성냥조차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성냥갑에 야광 염료를 칠해 찾기 쉽게 만들었죠."
그러면서 성광성냥은 공장이 자리한 경북 의성에 기여하는 향토 기업 역할을 했다. 의성군 각 마을 주민들에게 성냥갑 제조 등 일거리를 제공했다. 성냥갑에는 의성을 알리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당시 외지 사람들에게 '의성 하면 성냥'으로 인식됐던 이유다. 사실 '성광'(城光)의 한자어도 '의성(城)을 빛(光)낸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전성기는 흘러갔고, 지금 공장에 있는 종업원은 8명으로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가정은 물론 식당과 다방 테이블 위에 늘 성냥갑이 자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광고용 판촉물로만 성냥이 만들어진다. 매달 결산을 해보면 수익을 내기 힘들 때가 많단다.
하지만 손 씨는 공장 문을 닫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지난해 서울의 한 지역 일간지에서 취재를 하러 와서는 기사 마지막 부분에 '공장이 문을 닫는다고 연락이 왔다'고 썼지만 사실은 기자 마음대로 쓴 '오보'였단다. 손 씨는 "아직 성냥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또 우리나라의 마지막 성냥 공장을 보존해 지난 한 세기를 밝혔던 역사적 의미를 녹여 넣는다는 자부심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경북 의성군에서는 공장 일부를 박물관이나 체험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성냥은 생필품
지난 세기 성냥은 생필품이었다. 그래서 성냥값 인상 소식은 지금의 석유값 인상 소식처럼 신문 지면의 눈에 띄는 자리에 쓰였다. 성냥값 인상 요인은 주원료인 황린'적린'염소산가리의 수입 가격 인상이었다.
성냥은 '불처럼 (가세가) 확 퍼져라'는 의미를 담아 집들이 선물로도 애용됐다. 다른 속설도 있다. 예전에는 이사를 할 때 이전 집에서 누리던 복이 이어진다며 화로나 아궁이의 '불씨'를 가져갔는데 성냥도 불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선물로 인기였다는 것. 성냥이 많이 사라진 지금 집들이 선물은 '잘 풀려라'는 의미를 담은 휴지와 '행복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샘솟아라'는 의미를 담은 세제가 넘겨받은 상황이다.
좋은 의미를 담은 선물로 널리 인식되면서 성냥은 1960년대부터 생겨난 우리나라 광고용 판촉물의 시초가 됐다. 식당과 다방에서 신장개업을 하거나 업주가 바뀌었을 때 홍보용으로 성냥을 배포한 것. 유흥업소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행락지의 호텔 등 숙박업소는 봄철이 되면 손님들에게 성냥을 배포했다. 홍보용 성냥은 작은 종이 갑에 몇 개비만 담아도 돼 다른 판촉물에 비해 비용이 저렴했고, 사람들이 늘 주머니에 넣어 다녔기 때문에 전화번호와 약도를 적어 홍보하기 좋았다.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불을 쬐는 등 '불씨' 수요가 많은 연말연시에는 홍보용 성냥이 더욱 많이 생산됐다.
◆성냥은 장난감
성냥이 널리 확산되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부엌에서 불을 지필 일이 없는 아이들도 성냥을 손에 쥐게 됐다. 말썽꾸러기들의 불장난 도구가 된 것.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1996년 서울시 소방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그 해 1월부터 6월까지 서울시에서 발생한 2천509건의 화재 중 290건(11.5%)이 어린이 불장난 때문이었고, 이 중 성냥으로 불장난을 해 발생한 화재가 200건으로 가장 많았다. 불장난 장소는 빈집이나 야적장이 140건(48%)이었고, 아파트 등 주택이 103건(36%)으로 뒤를 이었다.
또, 주로 유흥업소에서 홍보용 성냥을 배포하면서 성냥갑에 새겨진 일명 '야한 사진'이 청소년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돼 몇몇 학생들은 주머니에 몰래 넣어 다니기도 했다.
성냥을 장난감으로 사용한 것은 아이들뿐이었을까? 젊은 남성들은 성냥을 흠모하기까지 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개봉해 '홍콩 느와르' 열풍을 일으킨 영화 '영웅본색'이 계기였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주윤발'은 남자의 우정과 의리에 대해 멋진 연기로 표현할 때마다 늘 입으로 성냥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직장인 박경운(44) 씨는 "주윤발의 낡은 바바리코트나 선글라스보다 입에 문 성냥이 더 멋졌다. 당시 성냥만 눈에 보이면 친구들과 주윤발처럼 성냥을 씹으며 폼을 쟀다"고 말했다.
일명 다방 '죽돌이'(하루 종일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있는 손님)들은 테이블마다 놓인 팔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잔뜩 꺼내 탑을 쌓았다. 탑을 무너뜨렸다가 다시 쌓기를 몇 번 반복하면 약속을 한 친구나 애인이 테이블 앞에 나타났다. 요즘 젊은이들은 카페에 앉으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린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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