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시계를 봤을때 '아차' 싶다. 늦었다. 서둘러 나선 출근길. 가속 페달을 밟는 발바닥에 힘이 들어간다.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차선을 넘나든다. 끼어드는 차에 양보 따윈 없다. 천천히 달리는 앞차에는 꽁무니에 바짝 붙어 상향등을 깜빡이며 위협한다. "저 차 운전자는 분명 '김여사'일거야." 입에서는 듣기 민망한 욕설이 줄줄 나오고 "고유가 시대에 왜 차를 끌고 나오냐"며 운전대를 쾅쾅 친다. 하지만 늦잠을 잔 건 순전히 자신 탓이고, 교통 정체가 '김여사' 때문도 아니다. 그냥 화풀이다. 도로는 화풀이가 가장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공간이다.
얼마 전 험담과 따돌림 때문에 직장에서 잘렸다고 믿었던 실업자는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흉기를 휘둘렀다.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옛 직장 상사와 동료를 칼로 찔렀고, 무고한 행인도 크게 다치게 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게 과연 옛 직장 동료들 탓이었을까. 왜 그들은 '명동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짓을 반복할까.
'화풀이 본능'은 화풀이의 원인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 책이다. 복수와 화풀이 본능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지배했으며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지 짚어낸다. 좌절감이 어떻게 인간의 공격성을 끌어내는지 분석하고 정신분석 이론과 동물학, 진화론, 문학과 예술 분야를 통찰해 '희생양 만들기'의 역사를 돌아본다.
'화풀이'에는 심리적인 기제가 작동한다. 엄격한 서열관계 속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들은 '종속 스트레스'를 겪는다. 서열이 낮은 개체가 사회적 갈등이나 충돌에서 패배한 후 겪게 되는 스트레스다. 종속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압이 오르고 부신호르몬 배출이 증가하며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는 신경전달 물질도 감소한다. 그러나 '분노를 전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몸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고통을 다른 개체에 떠넘김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줄이는 셈이다.
화풀이는 유인원과 조류, 어류, 곤충 등 거의 모든 생명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싸움에서 진 수컷 개코원숭이는 지나가는 만만한 젊은 수컷을 때린다. 몇 대 맞은 어린 수컷은 다시 갓 태어난 새끼를 두들겨팬다. 생물학자에게 둥지를 위협당한 독수리는 애먼 굴뚝새를 쫓아다니며 화풀이를 한다.
특히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개체에서 화풀이 성향은 강하게 드러난다. 화풀이 성향이 사회적 평판과 명성, 위계질서와 서열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 개체의 사회적 평판을 좌우하는 구경꾼들에게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아야만 '호구'로 찍히지 않을 수 있다.
상처받은 이들은 상처를 자신과 타인에게 전염시킨다. 저자들은 고통의 전달 방식을 '보복, 복수, 화풀이'(Retaliation, Revenge, Redirected Aggression) 등 '3R'로 규정한다. 이 가운데 가장 기이한 형태가 '화풀이'다. 화풀이는 고통을 상대에게 되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상관 없는 누군가에게 갚아주는 행위다. 여기서 '희생양'이 탄생한다.
특히 인간의 공격성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대규모의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2003년 미국 부시 정부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라크에 폭탄을 퍼부었다.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느낀 고통과 분노를 그렇게 풀었다는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스니아의 무슬림을 공격한 일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한다.
복수와 화풀이로 인한 비극은 끝없이 계속된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와 버지니아공대에서 벌어졌던 무차별 총격,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끝없는 반목, 묻지마 살인 등 끔찍한 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해 저자들은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고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사회적 작용이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고충에 주목하고 오류를 인식하고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거나 적어도 앙갚음하지 말아 달라고 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용서는 어려운 만큼 아름다우며 그 결단이 세상과 자신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352쪽. 1만8천원.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포항 찾은 한동훈 "박정희 때처럼 과학개발 100개년 계획 세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