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60) 이창환의 안동 도산면 온혜리

내 고향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나의 18대조 노송정(퇴계 이황의 조부)이 이곳에 입향한 후 진성 이씨가 대대로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들판이 협소해 가난한 마을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글공부에 매진했던 조상들이 여러 관직에서 이름을 낸 자랑스런 동네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 고향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나의 18대조 노송정(퇴계 이황의 조부)이 이곳에 입향한 후 진성 이씨가 대대로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들판이 협소해 가난한 마을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글공부에 매진했던 조상들이 여러 관직에서 이름을 낸 자랑스런 동네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온혜리 마을의 상징인 수령 400~500년 된 토종 밤나무. 마을 안산이 지네 형상을 하고 있어 지네가 마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산자락 곳곳에 가시가 달린 밤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온다.
온혜리 마을의 상징인 수령 400~500년 된 토종 밤나무. 마을 안산이 지네 형상을 하고 있어 지네가 마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산자락 곳곳에 가시가 달린 밤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온다.
나의 18대조 노송정(퇴계 이황의 조부) 종택 안채의 퇴계 선생이 탄생한 태실.
나의 18대조 노송정(퇴계 이황의 조부) 종택 안채의 퇴계 선생이 탄생한 태실.

"온계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옛 향기 풍겨주는 추로의 땅에 내일의 나라 위해 자라나는 새싹…." 내가 다닌 온혜초등학교 교가의 일부이다.

용두산 뻗어 내린 가애봉이 앞산에 우뚝하고 온계수가 시내를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온혜 중마'로 불리는데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이다. 안동시내에서 25㎞, 도산서원에서 2㎞(5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온혜리는 나의 18대조 노송정(휘 계양, 퇴계 이황의 조부) 할아버지께서 1454년에 개기하신 후 누대로 진성 이씨가 세거한 집성촌이다.

이곳에서 대현이 탄생할 것이라는 어떤 스님의 예언과 권유로 터를 잡은 지 반백 년이 못 되어 손자 퇴계 선생(태실이 노송정 종택에 있음)께서 탄생하셨다.

진성 이씨 조선조 문과 급제자(대과) 59인 중 노송정 할아버지 후손이 53명이니, 실로 학문을 크게 성취하신 분과 크고 작은 관작에 출사하신 분은 거의가 노송정 할아버지 자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고향 이야기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고향 산천에 대한 추억이다. 먼저 할아버지와 관련된 추억이다. 나는 퇴계 선생 태실로부터 50여m 거리에 있는 큰집에서 갑오년에 태어났고, 다섯 살 때부터 큰집(할아버지 댁)에서 기거하였다. 사랑방에서 자연스레 아침에 이불 개고 방을 쓸고 닦은 후 원근에서 공부하러 오는 청년들 사이에 끼어 훈몽(訓蒙)을 배웠다. 저녁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할아버지 이부자리를 펴 드리며 곁에서 잠을 잤다. 그때 잠버릇이 시동(尸童)과 같아 잠들던 자세 그대로 아침에 일어났고 어른이 되어서도 유지되고 있다.

가을이면 일찍 일어나 할아버지를 따라서 소란골, 아카시골로 산책을 하곤 했는데, 소란골 우리산에서 밤알차리(알밤)를 주워 패도(佩刀)로 깎아 주시던 그 밤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사랑방에는 갓 쓰고 의관 정제한 손님이 자주 오셨는데, 그때마다 어른들께 앞앞이 큰절을 드리면 할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 모모(아버지)의 장남 창환"이라고 말씀하셨다. 때로는 그 어른들 앞에서 시험 아닌 시험도 보아야 했다. 다름 아닌 배운 문장을 외우거나 붓글씨를 써 보이는 것이었는데, 시험(?) 후에는 반드시 칭찬 내지 용돈이라는 보상이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나고 삼칠 이전에 손자가 보고 싶으시면 의관 정제하시고 산방(産房)에 들어오셔서 보고 나가셨다고 한다. 지금도 어머니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시며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사랑을 전하신다. 그러나 '子欲養而하나 親不待'(자식이 모시려고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더니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급서하셨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약 5분 거리였기에 주로 점심은 집에 가서 먹었는데, 도시락 싸오는 친구들이 부러워 간혹 어머니를 졸라 도시락을 싸 간 적도 있었다. 6학년이 되어서는 '애향단' 단장을 맡아 동리 학생들을 인솔하여 마을에서 학교까지 길을 쓸고 길가에 꽃을 심고 꽃동산을 만드는 학생 4-H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운동회를 하였는데, 나는 운동신경이 뛰어났기에 늘 신이 났고 학교 대표 육상선수로서 경기는 했다 하면 일등이었다. 부상은 상(賞)자가 찍힌 공책 몇 권이었는데 주로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쓰였다.

가을 회전(큰 묘사)지내는 날에는 학교 옆 조산펄에서 음복을 나누어 주었는데, 조선종이에 싸고 짚으로 묶은 음복은 떡과 과일 몇 조각에 불과했으나 참으로 별미였다.

동리 앞 냇가에 소를 방목해 두고 친구들과 놀다가 해가 어둑해져서야 귀가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소가 없어져 찾아 헤매는 동안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온갖 나쁜 시나리오를 상상하던 일, 소가 들풀을 뜯다가 이웃집의 콩밭에 들어가 농사를 망치게 하여 한 바탕 소란을 피운 웃지 못할 추억도 있었다.

또 우리 집에는 염소를 길렀는데, 아침에 냇가 풀이 있는 곳에 매어 두었다가 저녁에 집으로 몰아오곤 하였다. 염소는 성질이 급하고 앞으로만 나아가며 뒤로 가지 않는다. 혼자서 여러 마리를 끌고 집으로 올 때에는 힘이 부족하여 원만히 통제할 수가 없었는데, 이 녀석들이 주인의 심정을 알 턱이 없어 제각각 달아나려 하기에 나는 그만 한 녀석에게 화풀이를 하며 그야말로 반쯤만 살게 하였다. 그 후 동네 일가 아지매가 보셨는지 '외내 댁 환이가 염소를 못살게 하더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직도 고향에선 그 추억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집 앞 송당 우물 맛은 먼 동네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일품이었다. 매년 초봄에 우물을 쳤는데(청소) 1급수에만 사는 고기가 살 정도로 맑았다. 또한 이곳은 동리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모여서 안부 묻고 수다 떠는 공공장소이기도 했다.

온혜초등학교 졸업생 대부분은 예안중학교에 진학했다. 예안중학교는 온혜에서 8㎞(20리) 길이었다. 버스가 하루 두 번 다녔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으며 요금도 부담스러워 걸어서 다녔다. 종종 학교에서 배구운동을 하고 늦어지면 학교에서 5리 거리인 오천동(외내) 외가로 가서 자기도 하였다. 외가에서는 '온혜 이실이 아들 창환'이라며, 왕자 대접을 해주셨기에 그 재미에 이런저런 구실로 더 자주 드나들게 되었던 것 같다. 외내 동네는 입향 후 500년이 훨씬 지난 광산 김씨 세거지로 안동 댐 수몰로 인하여 지금은 군자리로 이거하였다. 지금도 고향을 오고 갈 때면 시선은 잠시 외내로 고정되고, 그 당시 수박 서리를 하고 새벽이슬 맞으며 귀가하던 추억은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이다.

예안에서 온혜로 오는 길은 송티재에서 도산과 온혜로 갈리는데 이 재를 넘어 온혜 골짜기에서 여러 남매 모두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집은 전 국회의원 권오을 씨 집과 우리 집 등 몇 집에 불과하다. 우리 집보다 훨씬 형편이 좋은 집도 초등 또는 중학교만 다니게 하였던 그 당시를 생각해 볼 때, 두 집 어른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꿈이 있었으나 색신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크게 실망하여 그 꿈을 접게 되었다.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이 온계 제방을 무너뜨리고 인근 논밭을 초토화하였으며, 우리 가정에도 큰 시련을 주었다. 소란골에 있던 감자밭이 수해를 입게 되자, 이듬해 일곱 살이었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철사 망태기로 굵은 자갈들을 골라내며 생활터전이 사라져버린 안타까움과 서러움에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난다. 그 콩밭에 지금은 도산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논마저 수해를 입어 자갈논에 모심기 하느라 가족의 오른손 중지 손톱은 자갈과 왕모래에 부딪쳐 깨지고 피가 나곤 하였다. 지금은 옥토가 되어 있으나 그 논을 지날 때면 그때의 눈물과 핏물이 생각나 목에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킨다.

할아버지께서 종가, 문중, 서원 등 유림의 유사(有司)로서 솔선봉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군자의 정신을 배우게 되었다. 열일곱 살에 시집오셔 막내며느리로서 시부모 돌아가실 때까지 정성으로 봉양하신 어머니로부터 조상께 효도하는 기본을 배웠다. 온계수와 가애봉은 나에게 만 가지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포용과,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도시에서의 삶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늘 빈곤함을 느끼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물질이 풍족하지 않지만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안다. 도시생활은 늘 바빠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없지만 시골에서는 농사일에 골몰하여도 자신과 이웃을 살피는 여유로움이 있다.

타향살이에 심신이 힘들고 지쳐 돌아온다면, 언제든 반겨주겠노라고 내가 살던 집과 친구들, 그리고 일가친척이 있는 내 고향 온혜 중마는 나에게 웅변한다.

청년유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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